1n년째 디자인 덕질 중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서 예고에 들어가고, 순수예술보다는 디자인 쪽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좋은 직장을 갈 수 있는 기회가 많다고 해서 산업디자인과를 갔다.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와 그림에 매진했던 시기가 끝나니 대학에 가서는 정말 잘 놀았다. 4년 내내 과 엠티를 빠지지 않고 갈 정도로 노는 자리에 빠지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노는 자리에서 선후배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디자인에 대한 생각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디자인 덕후가 되어 가더라.
디자인 전시도 많이 보러 다니고, 디자인 도서 사는 데 돈 몰빵 하고, 영화나 TV 프로그램 보면서 촬영, 편집, 미술 부분에 대해 혼자 분석해 보고, 친구들이랑 각자의 관점에서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도 많이 가졌었다.
덕질하는데 시간을 쓰다 보니 성적은 고만고만했고 '좀만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대학 다니면서 잘 놀고 이야기 나눴던 경험들이 내 나름의 디자인 관점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기본 바탕이 되더라.
전공이 산업디자인과였기에 난 내가 편집디자인 중심의 그래픽 디자이너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3D 중심으로 사고하고, 디자인하던 학교 생활 중 편집디자인을 경험해 본 건 2학년 때 과제전 도록 만드는 일에 참여했을 때였다. 기본적으로 과제를 할 때 디자인에 대해 설명하는 패널이나 발표 PPT를 만들어야 하니 자연스럽게 편집디자인을 경험하는 중이었지만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내기 위해 디자인하는 과정을 보는 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타이포만으로 디자인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이름도 생소한 '쿽'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선배님이 쓱쓱 레이아웃 템플릿 만들고 한 페이지씩 만들어가는 걸 보는 거 자체가 재미있고 흥미롭더라.
이후 바쁘게 학교 생활하면서 편집디자인에 대한 흥미를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졸업한 뒤 직장을 찾다가 평소 좋아하던 출판사에 구인공고가 나온 걸 보고 덥석 지원했다. 본래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만드는 과정에 대해 하나도 아는 게 없고, 편집디자인 프로그램에 대한 것도 전혀 모르던 내가 2학년 때 찰나의 경험을 떠올리며 '재미있을 것 같은데 모르면 배워서 하면 되지' 하는 막무가내로 지원했던 거다. 그런데 뽑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무리 사람 뽑는데 시간이 급박했다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뽑은 회사가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들어간 자리는 출산 휴가를 두 달여 앞두신 분의 후임이었다. 당장 맡아야 할 일은 격월로 나오는 청소년 대상 잡지를 만드는 일이었고 마감은 입사한 다음 달이었다. 매킨토시는 손도 대본 적 없고, '쿽'은 대학 2학년 때 슬쩍 봤던 경험만 있던 내가 한 달 뒤 책을 만들어내야 했던 거다. 인수인계 겸 선임 디자이너분이 가르쳐주시면서 만들었지만 한 페이지 만드는 거 알려주시고 같은 템플릿 나머지들을 혼자 만들어보면서 정말 속성으로 편집디자인을 배웠다. 그런데 정말 '입금'되면 모든 걸 할 수 있다던 한 연예인의 말처럼 당장의 밥벌이가 걸려있다 보니 다 하게 되더라. 첫 권은 선임 디자이너 분과 같이 했지만 당장 다음 권부터 혼자 해야 하니 거의 모든 시간을 매킨토시 활용법, 쿽 사용법을 혼자 공부하면서 작업했었다. 원래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하는데 겁도 없고 빨리 배우는 편이었지만 이때의 경험이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더욱 주저함 없이 빨리 배우고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편집디자인부터 내 경력은 시작됐다. 책을 좋아하는 내가, 좋아하는 출판사의 공고를 보고 지원하고, 좋은 분들에게 배우면서 일할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때 배웠던 경험들이 디자인을 할 때의 기본 마음가짐과 태도의 바탕이 되면서 '내 평생의 천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밑거름인 것 같다.
1n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디자인 작업은 너무 재미있다. 시대의 흐름이 빨라져 계속해서 배워야 하고 봐야 하는 것들로 넘쳐나 체력이 부족함은 느끼지만 손에서 놓고 싶다는 생각은 한순간도 해본 적이 없다. 더불어 내 생애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디자인하기'다. 노년의 나이에도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놓치지 않았던 거장들을 보면서 그분들처럼 유명한 사람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좋아하는 작업을 끝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난 뒤에도 디자이너로서의 소회를 적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