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길 마중하는
집에 베개가 여럿 있다, 있었다. 솜 베개는 기본, 한참 유행하던 소재 가벼운 베개부터 오리털 베개, 메밀 베개, 편백 베개, 아이들 키우면서는 좁쌀 베개. 언젠가 홈쇼핑에선 숙면 베개 개발자가 나와서 바로 누우면 귀 양 옆이 폭 파묻히는 베개를 광고하고 있는 걸 본 적 있는데 유행을 따르기로 치면 십수 가지의 베개가 차고 넘칠 텐데 우리 집엔 옛날 베개 천지다.
버리고 새로 사는 베개를 제외하고, 주기적으로 관리하는 베개가 두 종류 있다. 메밀껍질 베개와 엄마가 따서 만들어 보내주신 순비기 열매 베개다. 막 빨 수 있는 화학솜 베개가 가장 만만하지만, 그 베개를 베고 자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겐 너무 넓고도 크고, 푹신해서다. 편백 동글동글 넣은 베개는 다 좋은데 좀 무겁다. 딱, 내 머리만큼의 무게를 견딜 정도의 높이와 얼굴이 묻히지 않을 정도의 크기면 좋다.
좋다고 쓰는 베개는 쓰다 보면 가루가 생겨 관리에 품이 든다. 일 년에 한 번씩은 깨끗이 씻어 말려 속을 다시 채우는데 이게 일이다. 메밀껍질을 처음 물에 담근 날은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도 그랬지만, 씻기도 전부터 큰 대야 한가득 받은 물 위로 동동 뜨며 넘치는데 배수구 막힐까 봐 난감했었다. 가벼워서 뜰 거라는 걸 생각 못 하고 한가득 부어 넣었으니 막 씻기도, 그렇다고 도로 담을 수도 없게 된 상황이 우스꽝스러웠다. 게다가 젖은 메밀껍질은 몇 날 며칠을 말려야 한다. 껍질이 겹쳐 공기틈이 없어 오로지 볕과 바람에 마를 밖에.
날이 좋을 땐 순비기 열매를 털어 씻는다. 먼지를 한 번 쳐내고, 훌훌 물을 묻히고, 바락바락 씻어 헹궈서 해 좋을 때 내어둔다. 반지르르 마르고 나면 향은 얼마나 좋은지. 손가락 사이로 후르르 훑어내리며 하염없이 장난질을 한다. 품이 들지만, 세탁 편한 베개보다 낫다. 낫다기보다 귀하다. 쓸모가 다 하면 버리고 편하게 사는 게 요즘인데 일을 만드는 내가 한편 답답하다가도 얼마나 더 이럴까 싶은 생각이 들면 하는 데까진 하다가 말아야지 한다.
메밀과 순비기는 척박한 땅에서 자란다. 윤기 자르르한 기름진 땅은 그들 몫이 아니다. 알맹이를 다 짜내 가벼워진 껍질로 남은 몸과 짠 바람 뜨거운 돌 틈에 뿌리를 내리고도 향기를 잃지 않은 그들 덕분에 나의 하루가 조용히 진다. '인제 그만 너의 머리맡을 떠나 소임인 싹 좀 틔우고 싶다'라고 순비기가 말하면 그땐 놔줄 생각이다. 해바람맞은 순비기랑 알콩달콩 단꿈 좀 더 꾸고 나서. 더 가벼워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이가 다시 메마른 땅을 찾을 때 그때까진 내 꿈길 마중하는 다정한 꿈 통이 되어주길.
출처 : 네이버 식물백과 야생화도감(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