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기록
일터 가까운 곳에 문방구가 있다. 초등학교가 가까우니 문방구 앞에는 아이들의 눈과 손을 홀릴 만한 기계들과 알록달록이들이 많다. 그중 중년의 우리들을 홀리고도 남는 것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문방구 앞 파리똥만 한 텃밭. 문방구 사장님은 텃밭 생명을 위한 가로 세로의 지지대를 미리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워낙 좁은 땅이라 하늘을 향하지 않으면 몸을 가눌 데가 없어서다. 오이, 참외, 고추, 수박, 블루베리 들은 정말이지 그러면 안 될 정도로 잘 자랐다. 큰 밭을 가지고도 농사짓기 힘들다는 사람이 들으면 혀를 찰 노릇처럼.
고추나 호박을 키워본 햇병아리로서 그들과 얼마만 한 체온을 나눠야 열매를 볼 수 있는지 모르는 나는 하늘을 나는 수박을 본 순간! 문방구 사장님의 비법을 꼭 듣고 싶었다. 문방구에 딱히 볼 일이 없는데도 들어가 사장님께 어쩌면 저렇게 잘 키우시냐고 한 수 알려 달라 청했다. 한 줌 되지도 않을 흙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기에 열매가 열리기까지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을까. 뭐 겨울엔 옹송거리고 다니느라 그쪽엔 눈 돌릴 겨를이 없었던 건 맞고. 사방이 회색인데 그 추위에 파릇한 새싹이 홀로 나올 리도 만무였긴 하고.
때는 오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생명을 키우기로 맘먹은 때로부터 기록을 해왔다는 사장님은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럼요? 보다시피 땅이 이렇게 작잖아요. 이런 데서 열매를 보려면 연구할 게 많아요. 실패할 때마다 조금씩 다른 방법을 적용했지요. 한해 조금씩 열매가 열리기 시작했고 그러다 올해는 이런 알토란 같은 결과를 얻으셨다는 거다. 맨눈으로 보기에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흙이라 물었다. 영양제를 좋은 걸 쓰시나요? 여러 번 말하지만 참 대단하세요! 하니 사람 좋은 웃음을 굴리는 사장님이 주섬주섬 계산대 밑에서 뭘 꺼내신다. 색색으로 기록한 걸 꺼내 보이시며 수줍은 빙그레다.
그림으로 그리고, 몇 줄씩 글로 써놓은 기록은 자세했다. 아들 순에서 나오는 손자순은 제거해야 하며, 난간은 어떻게 사용했는지, 애호박은 옆으로 자라게 돕고, 열매가 열리기 시작하면 얼마간의 비료를 며칠 간격으로 주어야 하는지, 뿌리는 얼마간의 깊이로 묻어야 하며, 오전 몇 시쯤에 손으로 수정을 시켜야 하는지 등등 책에서도 볼 수 없는 생생한 삶의 현장 기록이 빼곡했다. 열매만을 바라는 많은 이들이 보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일 만큼 실패를 실패로 남겨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결심을 보는 것 같았다. 실패의 기록을 수정하기를 오 년째 이어 오고 있으니.
이렇게 열심히 키운 열매들은 동네 명물이 되어 지나는 사람들이 감탄을 한다. 난간에 떡하니 올라앉은 애플수박의 푸르고 검은 줄은 여름을 부르고, 땡땡 여물어 약이 오른 고추는 날렵한 허리를 내민다. 물방울처럼 투명한 가시로 자라는 오이가 어떻게 자기를 지키는 성체로 자라는 지 문방구 앞을 다니며 보는 아이들은 매일이 새로웠을 거다. 행여나 아이들이 재밌다고, 혹여나 어른들이 탐스럽다고 다 따 가버리면 어뜩하냐고 아쉬운 소리를 했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많이 보았으니 됐지요, 어떻게 고추 좀 드릴까?” 하시는 거다. 두 번을 놀란다. 아유, 그런 뜻이 아니에요,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얼마 전, 동료가 신기한 듯 얘기를 건넨다. “그, 문방구 사장님 있잖아요, 요새는 목화를 키우시더라고.” 목. 화. 요? 오, 목화라니…. 울 엄마가 젤로 좋아하는 목화솜을 만드는 그 목화를…. 점심시간을 기다려 목화를 보러 갔다. 몇 년 전 순천 무진나루에서 지는 해 아래 보았던 목화는 금방이라도 붉게 물든 솜 날릴 듯 아련했는데 목화를 보러 가며 마음이 설렜다. 한 뿌리에도 색이 다른 꽃이 피어 있는 게 신기해 물었다. 이렇기도 하냐고. 접붙이 얘기를 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나비 날개를 모아 놓은 듯한 목화 꽃은 처음 본다. 감탄 말고 달리 할 말 없어 연신 사진만 찍어댔다. 씨를 좀 받고 싶다고 했더니 여물고 나서 내년 봄에 오라신다. 내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