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계절을 살아요
빨래를 갠다. 윗옷은 윗옷끼리, 아래옷은 아래옷끼리. 양쪽 어깨를 맞추고, 두 손을 포갠다. 허리를 접어 두 다리도 깍듯이. 양말은 짝 맞춰, 행주는 행주대로. 식구들 뛰는 발 모시고 불평 없이 달린 양말에도 잠시 안식을. 김칫국물, 간장 한 방울도 깨끗이 닦아내 말끔한 밥상 배웅과 마중 행주님 고맙습니다. 뻣뻣해진 몸 잠시 비벼 긴장 푸시고 다음 쓰일 날을 기다립니다.
베란다가 바쁘다. 봄 여름 밖에서 몸집 키운 화분들도 들어와 있고, 건조대 펼쳐진 사이를 오가며 빨래를 걷고, 넌다. 바람이 나풀 분다. 해가 길게 든다. 떨어진 열매 입에 물고 나무 위로 올라온 새는 발로 열매를 공 구르기 하듯 하는 모양이 희한하다. 화단은 낙엽들로 가득하고, 잎이 먼저 피어 꽃 있는 줄 몰랐던 깜짝 선물 같은 모과도 어느새 달린 것보다 떨어진 게 많다.
오랜만에 뒷산을 오른다. 산딸기, 은방울꽃 좋았던 언덕은 이미 가을빛이다. 도토리거위벌레가 푸르게 떨어뜨린 도토리는 그들 자손의 번영을 위해 기꺼이 제 목숨 내줬을 거다. 다람쥐에게도, 청설모에게도, 사람에게도 양식이 될 운명이지만, 올봄엔 어느 새가 떨어뜨린 덕분인지 화단 구석에도 떡갈나무 부지런히 싹 올렸지. 한 계단, 한 계단, 한 발, 한 발 오른다.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신혼살림을 차린 첫 집에서도 멀리 북한산이 보였다. 재개발 소식이 들려온 지는 꽤 되었는데 그런 얘긴 오래전부터 워낙 있었던 말이라 이번에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정말 한단다. 거기서 첫 아이를 낳았다. 꼭대기 층이라 여름엔 더웠고, 겨울엔 추웠다. 아이를 데리고 앉아 남편을 기다리며 타던 그네는 칠이 벗겨져 녹이 슬었고, 흙먼지 폴폴 날리며 다니던 버스 종점 가까이엔 시장이 있었다. 나직나직한 집들이 내는 소리와 냄새가 사람만큼 북적북적했다.
집이 헐리기 전에 한 번 가봐야지 맘만 먹고 있다가 지난주에 다녀왔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동네는 을씨년스러웠다. 주변을 둘러서 막을 쳐놓고 사람들 진입을 막고 있어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 말을 붙이며 잠시 사진만 찍고 오면 안 될까요? 물었다. 안 됩니다. 여기저기 다 부숴서 싹 다 막아놨어요. 잘못하다가 다쳐요, 위험하고. 아, 그러네요. 근데 제가 전에 여기 좀 살았었는데요, 옆에서 살짝만 보고 올게요. 말끝을 흐리며 집 가까이 다가갔다. 모른 척 다른 데를 보는 틈을 타 들어갔다.
깨진 유리 파편들 위를 걸으며 집 입구에 서서 위를 바라봤다. 그네는 이미 철거되었고, 잡풀만 무성했다. 이렇게 된 지 꽤 된 듯이 보였다. 몇 호였더라…. 생각이 안 난다. 찾아보고 올 걸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왕 온 거 한번 올라나 가 보자, 하는 맘이 동했다. 부서진 계단을 두세 칸씩 한걸음에 오른다. 끝 층에 서니 내 발이 저절로 살았던 집으로 간다. 삼십 년이 다 되어 가는 기억 속으로 간다. 추웠던, 또 더웠던 그 집을 거쳐 갔을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안방에 서서 창밖 멀리 보이는 북한산을 바라본다. 여기서 보는 산이 이만했구나. 그런데 인간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교회당 빨간 십자가를 본 깜깜한 날이 더 많았다고 여겨지는 까닭은 뭘까.
지난 시간 앞에 서 있다.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높은 산이 멀리서 보니 엄지손톱만 하다. 먼 산 빼어남은 보이지 않았고, 손톱 밑 티끌이 더 컸던 걸 이제야 본다. 뒤늦은 쓸쓸함이 더 일까 봐 어서 내려왔다. 계절 맞는 손이었겠지, 수북이 늙어가는 풀꽃이 바람 따라 흔들린다. 사람 다 빠져나간 차가운 콘크리트 틈으로, 개나리, 산장, 삼화, 태평이란 오랜 이름들 아래로 사람 북적였던 동네를 기억하려는 듯. 앞으로도 어디선가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새로 오는 자리에 무심히 또 반갑게 두 손을 포개고 허리를 접어 인사를 건네리라. 그 걸음이 첫걸음인 사람에게도, 마지막일 사람에게도.
모두 자기의 계절을 차곡차곡 준비한다. 한 어깨의 옆에는 한 어깨가, 두 손과 발은 서로 맞잡은 힘이 될 테지. 낙엽 위에 낙엽이 쌓이고, 어쩌다 한 번씩은 깜짝 선물 같은 일도 올 테다. 그러면 나는 버선발로 마중하리라. 뒤돌아 후회하지 않게 마음 다해 감당하리라. 아니 어쩌면 나는, 매 순간 선물 대하듯 진심으로 살아왔을지 몰라. 지나간 것의 무게를 견뎌 다음을 기약하는 ‘차곡차곡’한 가지런함을 믿고. 먼저의 날을 딛고 서는 오늘, 지나온 날을 담담히 적는 오늘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