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 르네 지라르
한 줄 평: 인간의 죄는 모방 욕망으로부터
스캔들: 모방적 경쟁 관계 (다른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처럼 되고 싶고, 질투하는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
성경에는 인간의 욕망과 갈등에 대한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잘 눈치채지 못하지만 말이죠. 우선 십계명을 보면 6번부터 9번까지는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사실상 6번부터 9번까지 금지한 행위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인간의 욕망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이웃의 것을 탐내는 욕망 자체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것을 탐내는 욕망이 발전하면 거짓말, 도둑질, 간음,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르네 지라르의 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십계명을 쓴 입법자가 가장 폭력적인 것부터 덜 폭력적인 것 순으로 금기사항을 나열하다가 이렇게 해서는 다 나열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런 폭력의 원인이 이웃의 것을 욕망하는 것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열 번째 계명에서 '행위'를 금하기보다는 '이웃의 것을 욕망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이웃의 것을 욕망하지 않으면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르네 지라르가 모방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방 욕망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제가 독일 3사의 자동차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쉽게 말해 독일 3사의 자동차를 욕망한다면) 제 욕망의 이유는 그 독일 3사 자동차를 소유한 다른 어떤 사람 때문일 겁니다. 욕망의 삼각형이라고도 불리는 건데요, 내가 어떤 물건을 갖고 싶어 하면 그건 그 물건 자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그 물건을 이미 소유한 어떤 사람이 멋있어 보여서 혹은 그걸 소유한 사람의 명성이 부러워서라는 겁니다. 명품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명품이라는 게 다른 일반적인 제품들보다 질이 좋겠지만, 사실 그 명품의 가치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바로 모방 욕망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라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인간의 모든 욕망은 모방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생존에 필요한 먹고, 싸고, 자는 자연적인 욕구를 제외하고서는 말이죠. 이게 바로 욕구와 욕망의 차이인데요, 욕망은 곧 모방 욕망이라는 게 지라르의 주장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라르가 모방 욕망을 무조건 나쁘게 보는 건 아닙니다. 비록 모방 욕망이 인간들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지만, 우리의 욕망이 모방적이지 않다면 인간은 동물과 같을 거라고 말합니다. 모방 욕망이 있기에 언어가 생겼고, 문화가 생겼다는 게 지라르의 주장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아마 마지막 리뷰에서 다룰 거 같습니다. 어쨌든 모방 욕망은 우리가 동물보다 상위의 존재로 만드는 동시에 동물 이하의 존재로 만듭니다.
인간들이 각자의 모방 욕망을 가지고 있을 때 인간들은 서로가 서로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모방 욕망을 부추기고 서로가 서로를 질투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바로 이겁니다. 모방적 경쟁 관계를 다른 말로 하면 '스캔들'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다리를 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름발이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에 걸려 비틀거리는 모습과 닮아있습니다. 그래서 모방적 경쟁 상태와 그 결과를 지칭하는 단어가 스캔들이 된 겁니다. 지금까지 모방 욕망을 십계명에서만 살펴봤지만, 이런 모방적 경쟁 관계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을 살펴볼 겁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따르라고 하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 자신을 모방하길 바라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모방 욕망을 조장하고 계신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본인 스스로의 욕망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욕망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한 분입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자신의 욕망을 예수님이 모방하도록 유도하고 시험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 욕망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욕망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보여주려는 것 하나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욕망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 마음속에 있는 모방 욕망을 잘 아셨고, 서로가 서로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스캔들은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걸 아셨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갖고 있는 그 모방 욕망을 다른 것으로 삼지 말고 오직 예수님 자신으로 삼기를 바라신 겁니다.
이렇게 사람들 개인의 모방 욕망을 해소하지 못한 채로 계속 두면 어떻게 될까요?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심화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인간 사회는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가 될 겁니다. 이럴 때 사회가 평화를 유지하는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희생양 메커니즘입니다. 희생양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렇다면 희생양 메커니즘이란 무엇일까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질투하고 갈등이 심화되면 이때 그 사회는 한 명의 희생양을 택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 희생양에게 서로의 질투와 폭력성을 모두 전가합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바뀌는 겁니다. 심각한 갈등에 있었던 그 사회는 만장일치로 한 명의 희생양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희생양이 죽을 때 그 사회 구성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각자의 갈등이 해소됨을 느끼고 그 사회는 평화를 되찾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희생양 메커니즘입니다.
그런데 이런 희생양 메커니즘이 복음서에 아주 뚜렷하게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호하며 반갑게 맞았던 군중들이 어느 순간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그를 처형하라고 고함을 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이런 군중에 휩쓸려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사회가 예수님이라는 한 명의 희생양을 택했을 때 서로 원수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화목해지는 모습을 복음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할 시기의 예루살렘은 극도로 불안한 사회였습니다. 일단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었고, 로마 총독 빌라도가 관리하는 동시에 또 다른 권력자인 헤롯이 있었습니다. 헤롯은 로마에서 권력을 인정해준 대리 통치자이자 유대인입니다. 쉽게 말해 헤롯은 유대인이면서 로마 앞잡이 노릇을 한 매국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와 헤롯이 친하지 않았다는 건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는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누가복음 23:12)
이런 식으로 서로 원수 관계에 있다가 예수님이라는 한 명의 희생양으로 인해 서로 화목하게 되는 관계가 또 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인데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모두 유대인들이지만 그들은 서로 친해질 수 없을 만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부활을 믿었지만,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서로 원수같이 지내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모함할 때는 함께 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마태복음 16:1)
심지어 바리새인과 로마 앞잡이이자 매국노라고 여겨지는 헤롯당이 함께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마가복음 3:6) 서로를 미워하고 원수 관계에 있던 헤롯과 빌라도,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는 하나가 되고 평화를 유지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반대'가 '일인에 대한 만인의 반대'로 변화되어 사회가 평화를 유지하는 방식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서 아주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희생양 메커니즘은 인류의 기원부터 지금까지 작동하고 있습니다. 비록 복음서에서 희생양 메커니즘이 뚜렷하게 밝혀지고 폭로되었지만, 요즘에 다시 사회적으로 이슈가 크게 되고 있는 학폭, 왕따 논란도 희생양 메커니즘이 아직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희생양 메커니즘에는 중요한 작동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희생양 메커니즘이 발현될 때 그 사회의 구성원들 즉 박해자들은 그 희생양이 정말로 공개 처형을 당할 만큼 큰 죄가 있다고 착각한다는 겁니다. 박해자들은 그 희생양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희생양이 죽을 때 박해자들이 모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 이들은 희생양 메커니즘 즉, 사탄에게 속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신 말씀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 34)
만약 박해자들 중 한 명이라도 희생양 메커니즘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희생양 메커니즘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겁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신화와 성경의 중요한 차이점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희생양을 보고 불쌍한 희생양으로 말하느냐 아니면 희생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말하느냐입니다.
리뷰 2편에서는 신화와 성경의 차이점을 설명하겠습니다. 리뷰 2편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라르는 성경을 진실, 신화를 거짓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의 근거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리뷰 2편을 보시면 왜 지라르가 기독교를 구한 인류학자라고 불리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