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나로 5 [온도]

나에겐 슬프지 않을 권리가 있다.

by 달결

하루를 살아간다.


뜻하지 않은 감정이 나를 감싼다.

준비하지 못한 방어벽 뒤로 감정이

밀려와 나를 집어삼킨다.

잠잠하던 나의 하루가 속절없이 침몰한다.

화려한 하루를,

남들보다 특별한 하루를 바라지 않았다.

그저 남들처럼 잔잔히 흘러가기를 원했을 뿐이다.

내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만큼 고요하게.


그러나 세상은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문득 길가에서 마주친

기억의 파편이 불쑥 나를 찌르고,

몰래 다가온 어둠의 속삭임이

불쑥 내 시야를 흐려놓는다.

단단하다고 믿었던,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을 뒤흔든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어.

아무 일도 일어나길 원치 않았어.

행복해지기 위해 필연적으로

불행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행복조차 필요 없다고 했잖아.

내 온 세계를 뒤엎어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고,

파도가 물러난 뒤에야 이제 행복할

차례라고 말할 거라면.

어느 것도 남겨두지 말고,

다 가져가라고 했잖아.


나에겐 슬프지 않을 권리가 있어.

나에겐 더 이상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어.


날 그냥 내버려 둬.

날 그냥, 날 그냥.


비명이 잦아든 자리에는

비릿하고 서늘한 물길이 차오른다.


그렇게 내 온 세계가 한 차례

뒤집히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잔잔한 하루조차 허락되지 않는

삶에서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내 마음의 온도를 타인 아닌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더는 뜻하지 않은 슬픔에

나를 값싸게 내어주지 않기 위해,

나는 아직 떨림이 멈추지 않은 손끝으로

바닥에 금을 긋는다.

보이지 않지만 선명한, 나만의 경계선이다.


감정에도 적당한 온도를

알려주는 선이 있었으면 좋겠다.

혼자 먼저 끓어올라 나중에

찾아올 실망에 몸부림치지 않게.

나도 모르게 차가워진 냉기로

누군가에게 예기치 못한 상처를 주지 않게.

성급하게 뜨거워져 쉽게 지치지 않게,

조심하다가 너무 늦어버린 마음 뒤에서

홀로 후회하지 않게 말이다.


관계의 적당한 온도를 알아서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투명하게 바라보고 싶다.

쉽게 권태로워지지도,

쉽게 부서지지도 않을 만큼의 거리.

딱 그만큼만 온기를 나누고,

그만큼만 서늘해지고 싶다.


내 안전선을 그어놓고 그 안에서만 숨쉬기로 한다.

더 이상 관계의 복잡한 미로 속에서

나를 잃기에는 너무 지쳤고,

시시각각 변해가는 타인의 감정에 내

밑바닥을 내어주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얇아졌기 때문이다.


이 선은 너를 밀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지키고 너를 조금 더 오래 보기 위해

내가 선택한 가장 서늘하고도 따뜻한 예의다.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


오늘 나의 하루는 이 선 안에서

비로소 고요하게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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