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나로 6 [시절]

시절은 사라졌고, 순간은 남았다.

by 달결

때론 가끔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살다가 현실이 너무 무거울 때,

해야 할 것들과 책임들의 벽 속에 숨이 막혀올 때,

아픈 육체가 유독 버거워 홀가분 해지고 싶을 때,

그래서 어느 시절로 가면 좋을까 생각하다 보면,

막상 떠오르는 시절이 없다.


왜 이리 고단했던 거야. 안쓰럽게.


연약한 살을 감추려 날개 밑으로 숨고 싶어도

내가 숨을 수 있는 날개가 없다.


예민하게 날 서 있던 어린 시절도

방황으로 휘둘리던 청춘 그 한가운데의 시절도.

분명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어째서 돌아가고픈 시절은 존재하지 않는지.



다만, 순간들은 있다.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서로 좋아하는 TV 채널을

보겠다며 투닥투닥 장난을 치던 기억.

북적거리던 어느 날의 저녁, 어른들과 따로

어린 우리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무서운 옛날이야기를 나누던 기억.

아빠와 토요일이면 서점에 가 함께

책을 고르던 기억.

생각보다 장난이 많은 엄마와

장난치며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웃던 기억.

동생과 책방에 같이 가 잔뜩 만화책을

빌려와 함께 본 기억.

유난히 장단이 잘 맞는 친척들과 밤새워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던 그 새벽공기의 기억.


지난한 시간이 지난 지금 그 기억들은

나를 살게도 하고, 나를 더 괴롭히기도 한다.


그 따뜻한 시간이 나에게

존재했으므로 나를 살게 하고

다시는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힌다.


아름다웠다기에는 많이 아팠고

고통스럽다기에는 분명 평안한 날도 있었다.


지금은 왜, 그러한 과거를 불러오고 싶은 걸까.

잠깐의 몸부림이길 바란다.


저 때의 내가, 지금도 여전하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그럼에도 다행히.

조금은 더 무뎌졌고

조금은 덜 흔들리고

조금은 더 단단하고

조금은 덜 신경 쓰며

살고 있다.


누군가의 시선에 예민했던 감각은 둔해져 갔고

누군가보다 내 생각, 나의 감정이 더 중요 해졌다.

나쁜 생각과 기억은 빠르게 지우려 노력했다.

억지로라도 행복하기보다

하루를 살아도 나답게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갑자기 생각의 전환을 얻은 것은 물론 아니다.

어쩌면 그것도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붙잡은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기억한다는 것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날이 오길 바란다.

기억이 내게도 추억이 될 수 있게.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나만의 속도로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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