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나로 4 [안식]

안전망이라는 위로: 꽃을 다듬고 활자에 머물다.

by 달결

책은 나에게 친구였다.


지식을 위해서도 아니고,

상상 나라로의 여행도 아니었다.

책은 유일하게 내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책을 읽으면 사람들은 우선 칭찬했다.

난 왜 칭찬을 들어야 하는지 몰랐다.

좋아서 했을 뿐인데.

칭찬을 마다할 이유도 없었지만,

내게 책은 칭찬보다 생존에 가까웠다.

무수한 활자에 들어가 있다 보면

난 잠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선택했을 뿐이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나는 그 글 속의

주인공이 되어 마음껏 행복할 수 있고,

부를 누릴 수 있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더 끌렸던 것은

그곳에서의 처절한 고통도,

지독한 가난도, 지긋지긋한 불행도

그 모든 것을 마음껏 누려도

결국은 내 것은 아닌 안전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현실에서는 내게 실제로 언제 일어날지 모를

불안정한 삶이 소설 속 안에서만큼은

결코 나를 헤치지 못할 테니까.

그 사실은 나를 안심하게 했고 나를 쉬게 해 주었다.

불안감이 높았던 내게 세상이라는 무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책에 빠져 지내던 내게 또 다른 친구가 생겼다.


꽃이었다.

예뻐서 좋아하던 꽃은 낭만을 잊은 내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한 시절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다 어느 날 다시 시야에 들어온

꽃은 나에게 위로였다.

이른 아침 준비를 마치고

꽃시장에 가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꽃이

각자의 색으로, 각자의 향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시들고 지친 나를 잠시나마

그 생기로 가려주고 웃게 한다.

한 아름 품에 안고 텅 빈 집에 돌아와

꽃을 다듬다 보면 생각보다 손이 가고

버려지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체로도 충분히 예쁜 꽃이라도 나눠지고 선택된다.

시든 풀잎, 시든 꽃잎은 물론,

싱싱한 풀잎조차 너무 많으면 버려지고 만다.

할 일들은 잠시 뒤로 미루고 꽃을 다듬는 일을

반복하며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비운다.

아무 생각 없이 어울리는

색의 꽃들을 생각하다 보면

잠시 고민도 뒤로 미뤄진다. 그래도 못 참겠으면

울면 그만이다. 지금은 혼자니까.

꽃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눈물도 멈출 테니.

나의 세상이 고요한 그 시간에서야 내 모습을

조금이나마 내보일 수 있다.

곧 날 또 숨겨야 하니 나와의 만남은

언제나 짧고 낯설다.


책 속에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처럼

난 현실에서도 가면을 쓴 채,

눈물은 감추고 꽃을 다듬다 떠오른

누군가에게 작은 꽃다발을 선물하겠지.

난 여전히 괜찮아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살아가기 위해

멈춰있지만은 않은 나를 발견한 날이기도 하다.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어린 날의 나도, 지금의 나도,

나를 지키기 위해 숨을 곳을 마련하고

위로의 방법을 찾아왔다는 것을.


하지만 책과 꽃이 나를 대신해

숨 쉬어 주는 외부의 산소라면,

글을 쓰는 일은 비로소 내 안의 숨을

고르게 내뱉는 일이었다.


글을 쓰는 순간은 모든 것이 멈춘다.

귀에 울리던 음악도,

옆에서 들리던 소음들도.

바라보는 것은 오로지 하얗게 빛나는

화면과 그 위를 채워나가는 글자들뿐.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들조차

소리를 죽이고 다듬어져

흰 바탕을 채울 준비를 한다.


나는 고요한 그 문간을 사랑한다.

여전히 모든 것은 그대로일지라도,

내가 나를 고립시키는 그 투명한 공간.

나를 흔들던 모든 것들이

잠시나마 숨을 죽이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춘 그 시간을 사랑한다.

나조차도 멈출 수 있게 되는,

유일한 그 시간을.


그렇게 노력했구나.

그렇게 나를 사랑했구나.

오늘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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