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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Apr 30. 2024

우리 여행은 얼굴무늬 수막새였어

'얼굴무늬 수막새'가 그야말로 멋지지 않아?

삶이 던진 질문에 나는 시종일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동그랗고 예쁜 기왓장들 말고 왜 하필 한쪽이 부서져진 그것인지. 묵묵부답인 내게 대답을 듣고 싶었는지, 삶은 그날의 내 제주여행을 '부서진 기왓장' 모양새로 만들어놨다. 1주일 전 친구들과 제주여행을 하며 나는, 수막새의 동그란 겉면을 밟다가 울퉁불퉁한 곳을 지났다. 그리고 부서진 면에 가 닿았다. 그날 나는 얼굴무늬 수막새의 궤적을 따른 모양이었다.


당일치기 여행일정은 심플했다. 밥을 두 끼 먹고 그 사이사이 한라수목원과 카페에 들르기로 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함께 야외명상' 로맨스도 이날 실현해 보기로.

제주에 도착해 렌터카를 픽업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 A와 B를 만났다. 우리는 금세 '제주도여행온사람' 모드가 되었다. 야호 밥 먹으러 가자!


제주에 사는 C와 하루 먼저 도착해 오롯한 시간을 즐기던 D까지. 친구들이 모두 한라수목원 근처 식당으로 모였다. 예약시간보다 1시간 빠르게 식당에 도착했지만 사장님은 친절히 우리를 맞아주셨다. 비록 내가 전날 온라인으로 예약한 흑돼지 해물구이는 완전히 잊고 계셨지만!  어차피 잊으신 거, 나는 오늘 여기서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로 작정했으므로, 그럼 새로 주문하면 되겠네요.라고 말씀드렸다.


윌리엄 샤로안의 말처럼, "음식을 식도로 넘겨 뱃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일을 놓고 야단법석을 떠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모드를 택했다. 그가 먹는 행위 전체를 놓고 그랬던 것에 비해, 나는 지금 한번 그런 척하고 있는 것이지만. 윌리엄의 말까지 대동하며 아쉬운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던 나와 달리, 친구들은 이미 메뉴판 속 솥밥사진을 보며 환호하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나물 위주의 반찬에 이어 당근, 취, 무가 들어간 솥밥이 나왔다. 밥을 바닥까지 긁어먹다 보니, 아까 흑돼지 해물구이를 애타게 찾던 사람이 나였나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배를 퉁퉁 치며 한라수목원으로 향했다.


4월의 한라수목원에는 초록빛에 진심 어린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색깔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초록일 수 있는지,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같은 녹색이 하나 없다며 감동했다. 꽝꽝나무며 아왜나무며 이름들은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킥킥거리며 걷는 친구들이 마치 네 살 아이 같았다. 한 곳을 지나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는 사람들. 이들에게 나무와 꽃, 고사리와 이끼는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다음순서는 야외명상이에요! 시간이 쉬이 잊히는 공간에서 나는 즐겁게 알람을 울렸다.


푸르름을 뒤에 두고 앞에 보이는 정자로 향했다. 천장이 있는 형태라 아늑했다. 각자 자리에 앉아 편하게 눈을 감았다. 제주에서 명상지도를 하고 있는 친구 C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명상을 마치고, 대나무숲으로 가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우리는 난데없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오르자 정상이 나왔고 뒷산으로 동네마실을 나온듯한 현지인에게 부탁해 단체사진을 찍었다. 누가봐도 즐거운 관광객들이었다.


비가 언제부터 왔지? 사진을 찍고 내려가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우리는 비가 오는지도 모른 채 사진을 찍고 있었나보다. 눈에 보일만큼 빗줄기가 굵어져서야 비가 오는지 알았다. 내려오는 길에 그토록 찾던 대나무숲을 만났다. 하늘로 쭉쭉 뻗은 대나무들 사이로 커다란 죽순을 만났을 때, 이런 거짓말!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감싸며 외쳤다. 내 키만 한 죽순을 보고 그 어린 대나무의 잠재력에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매번 내 손가락만 한 죽순을 입에 가져가 먹기에 바빴는데, 그동안 내가 본 것들이 이렇게 거짓이었다니! 친구들이 웃었다.


한라수목원을 걸으며 내 허리쯤 둥치에 감탄과 놀라움의 테가 한 줄 새겨졌다. 이 감각을 잊지 않겠노라 허리에 손을 얹고 다음 장소로 향했다. 이동하며 B가 콧노래를 불렀다. 콧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래요. D가 말했다. 신이 난 콧노래 소리도, D의 고왔던 목소리도 내 마음속 둥치에 넣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10분쯤 달려 진정성이 돋보이는 회백색 카페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시간이 어떻게 흘렀더라. 아마 시간은 정지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플랫화이트를 마시면서, 만나서 얘기해야지 하며 아껴두던 이야기들을 정성껏 풀었다. 나는, 카톡 메시지로 얘기하기에는 내용이 길거나 표정과 손짓이 절실히 필요한 이야기들은차곡차곡 '만나서 얘기할 것' 카테코리에 분류해 두었었다. 그 카테고리에 이야기가 가득 모였을 때쯤 자연스레 만나는 이런 방식은 우리에게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꾹 참고 아껴두었던 초콜릿을 꺼내먹는 것처럼.


스마트폰으로 꺼내어 생각나는 이야기를 분출하듯 말할 수 있음에도, 그 생각들을 시간에 묵혔다 꺼내놓는 것, 이것은 전에 없던 즐거움이었다. 말을 하고 싶었던 순간과 이야기를 내어놓는 지금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생각을 숙성시켰다. 잘 익은 음식을 올리듯 내 생각을 정성껏 대접하는 느낌이 좋았다.


우리의 마지막 성찬장소는 아랍음식점이었다. 심심해도 맛있네. 먹으면 먹을수록 맛과 간은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아랍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며, '아살람'이라는 식당이름처럼 이것이 '평화'인가 보다 싶었다. 저녁 어스름에 헤어지면서,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서로를 꼭 껴 안았다. 공항에 와서 체크인을 하려고 내 예약번호를 넣어보기 전까지, 내 마음은 가득 찬 것 같기도 텅 빈 것 같기도 한 평화로 가득했다.


공항은 사람들로 즐비했다. 사이사이를 비집고 체크인을 하려고 기계에 예약번호를 입력했다. 왜 자꾸 에러가 나지. 계속 '검색 불가'메시지가 떴다. 기계를 바꾸어가며 세 번을 더 확인했을 때 알았다.

비행기를 놓쳤구나. 

의도하지도 원치도 않았던 일이었다. 마음에 평화가 박 갈라지듯 쩍 하고 갈라지는데 A와 D가 다가왔다.

이거 환불받을 수 있으니까 비행기 다시 검색해 봐. A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가능한 티 나지 않도록 스마트폰을 꾹꾹 눌렀다. 마침 D와 같은 9시 비행기에 자리가 하나 있었다. 예약을 완료할 때까지 벌벌 떨었다. A와 D가 없었다면 나는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그렇게 김포로, 김포에서 마지막 지하철을 타고 서울집에 도착했다. 아가가 곤히 자고 있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늘 그렇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 든 느낌이었다.


남편이 제주도에서 무엇을 했는지 물었을 때, 대답했다. 친구들이랑 밥 먹고 카페 다녀왔어. 그랬다. 일상처럼 흔한 여행이었다. 그러다가 돌아오는 비행기를 놓친 칠칠치 못한 여행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날을 떠올리면 초록빛과 함께 그녀들의 아이 같은 감탄이 떠오름은 어찌할 수 없나 보다. 그 모습들이 생각나 얼굴무늬 수막새처럼 웃었다. 늘 불완전하게만 보였던 그것이 아름답게 보인 게 이즈음부터였나 보다. 세상에 화답하는 친구들의 눈빛, 웃음소리 그리고 다정한 포옹 덕분이었을까.


누가 그랬더라. 얼굴무늬 수막새는 부서진 얼굴 때문에 미완성이라지만, 그래서 그 이상의 미학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고. 우리 눈에는 미완으로 보이더라도 실은 완성 그 이상을 느낄 수 있다고.

여행 덕분에 나는 얼굴무늬 수막새를 기대하게 되었다. 그 불완전한 궤적을 하루하루 따르다 보면 미완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알게되지 않을까하고. 그것처럼 웃다보면 취약함이 돋보이는 나만의 수막새로도 기쁘지 아니할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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