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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Apr 18. 2024

견딜만한 고통을 받는다는 것

결국 우리는 살면서 한 번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나름의 모습으로 희부연 안갯속에서 그저 질문과 마주할 뿐이다. 누구는 당당히 서서, 누구는 삐딱히 걸터앉아, 누구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무릎을 꿇은 채로.


지인 ㅁ은 그 질문이 자신에게 너무 어린 시절에 찾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이들이 학교와 학원을 오갈 때, 방 한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그것과 마주해야 했다고. 공원으로 나가 햇살이 내린 나무를 볼 때에도, 친구와 함께 떡볶이를 먹을 때에도 그 질문이 목구멍을 단단히 막았기에, 아무리 컥컥 대며 기침을 해본 들 소용이 없었단다. 그래서 그는 그 질문이 무릎을 꿇리기 전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었다고 했다.


지혜롭고 현명했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후 그가 살아계실 때 불리던 이름, 병원장 김 아무개의 딸 ㅁ은, 모든 수식어가 사라진 그저 ㅁ이 되어버렸다. 그는 검고 막막했던 그 시간들이 자신을 더 나은 학위나 더 좋은 집 같은, '더 좋은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옭아맸기에 억울하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며 ㅁ의 얼굴에 웃음이 돌았던 찰나를 나는 기억한다. 그는 그가 마주한 시간을 통해 철저히 자신이 되었으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 중 확실한 것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명징히 알았단다. 그래서인지 내가 생각하는 삶에서의 여러 문제들은 - 더 좋은 집을 갖거나 명예를 얻는 - 그에겐 더 이상 고민거리가 아닌 것 같다. ㅁ은 자신이 명백히 알았다던 그것을 이야기한 후,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고 그 모습이 걷는다기 보다 마치 사뿐히 나는 것 같았으므로, 나는 그것이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지인 ㅇ은 자주 가슴을 쳤다고 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고 결혼 후 시댁과의 불화는 크게 이는 불길로, 길길이 날뛰는 불꽃의 형상으로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다고 했다. 불길을 피하려 그녀는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침잠해 들었다.


자신과의 거리가 음으로 수렴하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불꽃으로 던져진 그 질문을 목숨처럼 붙들었다고 했다. 그것은 그녀를 자기 내면의 깊은 호수 그 끝까지 가 닿게 하였고, 내가 느끼기에 그녀는 그 끝에서 자신만이 가진 힘과 만난 듯했다. 그것은 타인의 어둠에서 빛을 발견하는 힘.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녀는 손사래를 치고 조용히 웃으며 아니에요.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지만, 나에게서 밝음을 찾아낸 것이 그녀였기에 나는 말할 수 있다.


나는 늘 중간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자기소개서를 쓸 때 평범한 나 자신과, 그런 나와 비슷한 부모님을 극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써야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것 외에는 크게 잘하는 것이 없었고 머리가 산란할 만큼 관심사가 많았다. 그래서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는 폭력적인 질문이 만연했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스스로의 정체를 늘 의심했다. 내가 아는 이들처럼 현재와 대비되는 어린 시절이 없었기에 나는 내 과거가 너무나 밍숭했다고 투덜대다가도, 이내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그런 날을 오갔다.


나에게 그 질문이 찾아온 것은 첫 임신 8주 차에 유산이 되었을 때였다. 늘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만 '나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망동으로 산지 서른 해가 지날 무렵이었다. 수많은 죽음을 '간접적으로만' 겪었던 나에게 그 경험은 손에 못을 박는 것과 같았다.


지금의 나는 ㅁ처럼 날지도 못하고 ㅇ처럼 빛나는 힘도 없지만, 삐딱하게 걸터앉아 맞아들인 그 질문이 나를 어딘가로 이끌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무엇인가.

살면서 그 질문은 길길이 날뛰는 불길로 또는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물결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나는 신이 우리에게 '우리가 견딜 만큼의 고통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명정대한 신은 우리에게 똑같은 고통을 주며, 단지 우리가 그 질문 앞에서 얼만큼 발가벗겨졌는지에 따라 우리가 부여한 고통값이 정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 벗겨짐으로 투명해져 그것이 수치가 아님을 알 때 고통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의미대로라면 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가는 길에 가방에 챙겨 넣을 것은 감사함. 그 질문이 나에게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마음, 그뿐이겠다.




*그림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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