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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Apr 23. 2024

콜 미 바이 마이네임, 내 이름으로 불러줘.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랄지 존재감이 거주하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여긴 뭐든지 너무 빨리 잊고, 저는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습니다.(p.202)
                                            『빛의 호위』 조해진, 창비


새 이름을 짓기로 했다. 나는 보통 생각이 들면 잽싸게 행동하는데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말한 지 20년 만이다. 왜 이리 오래 걸렸을까. 내 이름은 참 별로야.라는, 좋지도 싫지도 않은 미지근함 속에 발을 오래 담갔다. 내 이전이름으로 나를 기억할 사람들도 있잖아.라는 생각에 발을 빼려고 하지 않았다. 한데, 내가 그들과 연락은 하고 있던가. 그들이 연락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었던가. 스크롤을 내리며 휴대폰 속에 저장된 이름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았다. 그래 이제는, 새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구실로 안부를 묻고 싶은 이들을 연락처에 남겨두자. 연락할 처소에 머무는 그들의 이름을 보는 것, 그 자체가 기쁨이 되도록. 나 또한 새 이름으로 그들의 연락처에 들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준 친척에게 새 이름을 부탁드리는 과정 내내 기분이 좋았다. 부모님은 내가 태어난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셨지만 큰 일은 아니었다. 나를 낳을 때쯤 동이 텄다는 엄마의 말을 단서 삼아, 1월 아침 해 뜨는 시간을 검색해 알려드렸다. 7시쯤 태어났어요.

이름을 짓는데 그래도 꽤 큰돈이 드는데 시간을 정확히 알려드려야 하지 않을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것은 별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근 40년간 살던 집을 떠나면서 나는 이미 설레고 있었으므로.


내가 대대손손 불릴 이름이니 개명을 추진하겠노라 확정 한 날은 엉뚱하게도 시어른들의 제삿날이었다. 일 년에 한 번 남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이렇게 네 분을 모시는 그 날.

나는 해마다 영정사진 속 시할머니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갔다. 시할머니는 남편이 어렸을 때 돌아가셨으므로 내가 그녀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이상하리만치 연결감을 느꼈다. 그 연결감은 남편이 "할머니가 난생처음 꿈에 나왔어."라며 어리둥절해했던 그때부터, 우리가 결혼을 하겠다고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던 그 무렵이었다.


남편의 꿈속에서 할머니는 하얀 한복을 입고 그에게 다가와 그를 꼭 끌어안아주셨다고. 누군가는 그게 제사에 참석하는 이유냐고 묻겠지만 나는 그녀가 그렇게 등장함으로써 우리의 결혼을 크게 기뻐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으므로, 환대받는 느낌,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한 이유였다. 나는 그 날을 '인사드리는 날'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그래서 1년에 한 번은 기꺼이 가고 싶어졌다.


첫째가 3살이 되자 제삿상 위, 사진 속 인물들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려주어야 했는데, '증조'자가 붙은 어른들을 설명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아빠의 할아버지의 아빠."

첫째는 그저 본인의 아빠와 할아버지를 번갈아보며 눈만 뻐끔거렸고, 그 모습을 보니 먼 미래에 누군가 나를 기린다면 '누구의 할머니의 할머니'라기보다는 내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주가 나를 이름으로 부르게 하라'고 유언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그 작은 입이 내이름을 부르며 명확한 수식어를 떠올릴 수 있다면 또한 얼마나 좋을까! 예를 들어 신사임당을 떠올리면 현모양처가 떠오르듯 말이다.


지금, 내 이름의 이미지가 희미한 것은 자신을 명명해 보려 노력하지 않은 게으름 때문이리라. 그 게으름이 부끄럽다는 것은 또 알아서 '제가 아직 정체성 확립이 안되어서요'라는 문장 뒤에 눈만 가리고 숨었다.


정체성을 갖는다는 말이 자기를 확립하며 외부에 경계선을 그어보겠다는 뜻이 아님에도, 그게 그런 거 아니겠냐고 스스로를 꽤 오래 속였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정체성은 세포막 같은 것으로 능동적, 수동적으로 외부 환경과 필요한 것들을 교환하면서, 스스로가 터져 없어지지 않도록 하는 '투명한 막'같은 것이다. 나를 지키며 세상과의 교류를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러니 그 세포막이 견고하다면 내 이름으로 나를 드러내는 것은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다.


올해는 새로 지은 이름으로 제사에 참석한다. 그날 제사상 위, 사진 속 할머니에게 내 이름을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것도 알아내어 이제 그녀를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그렇게 올해는 내 새로운 정체성에, 휴대폰 속 사람들에게, 사라진 세계의 할머니에게 최대의 예를 갖춘 해가 될 것이다.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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