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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May 17. 2024

대충력

이유식 만드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힘


나는 이유식을 만들 때 여러 힘이 필요하다. 먼저 자기 조절력. 스파출러를 다루는 손이 정교하지 못한 나는 끈적거리는 밥을 자주 흘린다. 그걸 볼 때마다 이걸 다 언제 닦아. 하며 화가 나지만 그런 걸로 화를 내긴 싫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기억력. 이유식을 만들 때마다 식재료를 매번 저울로 재야 하는데 소고기는 얼만큼이 60그람이고 시금치는 얼만큼이 30그람인지 늘 헷갈린다. 저울질이 귀찮아 이유식을 만들기 싫다. 한번 저울로 가늠할 때 눈대중을 잘해두거나, 시금치는 다섯 뿌리에 속한 잎들이 30그람이라고 암기하지만3일 후면 영락없이 기억나지 않는다.


오늘 이유식 재료는 소고기, 대구살, 시금치, 당근, 고구마, 단호박이었는데, 한 두 가지만 저울로 재는 것은 불공평한 같아 모두 눈대중으로 쟀다. 적당히 찌고 삶은 재료들은 갈아둔 쌀밥과 비볐다. 흡족하게 3일 치 이유식이 만들어졌다. 남편은 내가 이유식을 계속 만들도록 독려하려는지 그냥 계속 만들다 보면 나아진다고 하는데 나는 오늘도 시금치와 싸움 중이다. 너는 이파리 몇 장이 30그람이냐고.


어느 날은 냉동실에서 이유식을 꺼내려는데 아뿔싸,이유식이 하나도 없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야채가게가 있고 냉동실에 소고기가 얼려져 있지만 나는 이 시간 책을 읽고 싶다. 이유식의 부재는 내 부지런함을 증명했다. 아직까지 이런 날이 한 번도 없던 걸 보니 나는 3-4일에 한 번씩 이유식을 만들고 있던 것! 이런 나를 칭찬하며 결정했다. 둘째야 오늘은 너 분유만 먹어야 돼. 이런 사실을 아는지 둘째는 쪽쪽 분유를 잘도 먹어 고마웠다.


첫째는 남편이 이유식을 모두 만들었기 때문에 둘째는 내 차지다. 둘째는 아토피 피부염 때문에 식재료를 일반적인 스케줄보다 늦게 추가하고 있는 터라, 시판 이유식을 사 먹일 엄두는 내지 못한다. 만들 때마다 식재료를 쿠팡에서 주문하는 것이 번거로울뿐더러 한 번 만들 때 소량씩 사용하므로 재료들이 남는다. 재료가 많이 남는다고 다른 엄마아빠들도 성토했는지 이유식 책에는 남은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어른 메뉴가 늘 함께 제시된다. 요리에 겁을 내는 나는 그 내용을 한 페이지도 보지 않았지만 책을 살 땐 이런 내용도 있다며 좋아했다. 요리를 즐기는 분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


이런 나는 결국 식재료도 내 마음대로 사서 원하는 대로 이유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기베이스에 이파리 채소 2-3가지를 사고 내가 쪄서 먹기 좋아하는 단호박이나 고구마를 추가하는 방식이다. 그래도 남는 재료들은 된장찌개를 만들었다. 이래서 찌개 한 두 가지는 만들 줄 알아야 되나 보다. 재료가 아깝다는 마음을 달래 줄 일품요리이므로.


둘째는 내가 이유식을 만들면서 내는 소리 - 엇, 이게 뭐야, 어이쿠 - 를 거실에서 놀며 듣고 있다. 그는 내가 위에서  말한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하다. 이유식을 한 번도 먹지 못한 그날은 그가 부엌 쪽을 두리번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엄마가 과거 헛된 완벽성 추구로 스스로를 갉아먹었다는 것을 내 뱃속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았나보다. 가만히 나를 보며 이제 대충력을 한번 발휘해 보라는 듯하다.


나는 둘째가 그럴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도 하고.




* 버튼을 잘못 눌렀는지 작성했던 <대충력> 글이 사라졌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글을 다시 써넣습니다.  확인하자마자 소리를 너무 질러 목이 아픈 하루입니다 :-)


PS. 읽고 댓글달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방숙, 세라, 류귀복, Hannah  달아주신 댓글이 사라져 눈물을 머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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