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하 May 18. 2024

길치력

타인과 내가 연결되는 힘


내 길치는 남편과 결혼하는데 공을 인정받아 길치'력'이 되며, 그 지위가 힘으로 격상되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은, 내가 길을 모르면서도 반보 앞장서서 걷는다거나 갈림길이 나와도 지체 없이 왼쪽으로 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다음에도 또 그러는지 만나보고 싶었다고. 나는 그가 연애초기에 측은함을 사랑이라 착각한 것은 아닐까 종종 생각한다. 어찌 보면 그런 감정이 어떤 빛깔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데, 특히 만남이 만남으로 이어지는데 '길치력' 같은 것도 도움이 된다는 게 중요할 뿐.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내가, 길치라는 사실을 계속 수치스럽다고 여길 것 같아서다.


이제 남편이 된 그는 나에게 자주 말한다.  당신은 이 시대에 태어났으니까 살아남았지 만약 원시시대에 태어났으면 동굴로 돌아오지 못해 죽었을 거라고. 남편이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는 아마 키 작은 원시인의 손을 끌어 무리로 데려오는, 측은지심 가득한 그런 원시인이 아니었을까.


그를 만나기 전에는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긴 아빠가 자주 챙겨주셨다. 초행길을 가려면 늘 1시간은 일찍 출발해야하는 내가 안타까웠나 보다. 그는 내 외출 계획을 묻고는 이런저런 큰 건물을 이정표 삼아 다니라고 조언해 주셨다. 내가 중고등학생만 해도 스마트폰 속 온라인 지도가 지금 같지 않아 아빠의 조언대로 큰 건물을 닻 삼아 다녔다. 공간에 닻 내릴 수 있는 것들을 이정표 삼아 다니니 마음이 편했다. 남들보단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낮에는 그럭저럭 다닐 만했다. 밤이 문제였다. 빛이 없으면 세상은 나에게 곧 새로운 공간이 되었다. 밤이 아득히 깜깜했던 시골에 살던 나에게, 해지기 전 집으로 돌아오는 습관은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지금 사는 이 도시는 밤에도 여기저기 빛이라 나는 그 혜택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두려움을 덜어내는 데, 밤을 가득 채우는 빛들과 함께 온라인 지도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온라인 지도는 낯선 곳으로 혼자 가기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었다. 지난달에 친구들과 제주도 당일치기 여행을 계획하며, 각자 다른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서 만나기로 하면서도 크게 무섭지 않았다. 초행길인데 김포공항까지 혼자 갈 수 있겠냐고 묻는 남편에게 요즘은 온라인 지도가 잘 되어 있으니 걱정 말라고 수차례 이야기했다. 믿겠노라 대답을 하지 않는 걸 보니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집에서 출발한지 1시간 정도가 지나자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잘 도착했느냐고. 그것은 잘 다녀오라고 말하기 전 의례적인 물음이 아니라, 정말로 김포땅에 내 발이 닿았는지 걱정하고 있다는 것임을 나는 안다. 그런 그에게 곧 이륙할 비행기 사진과 여유로움을 뽐내는 이모티콘을 잔뜩 보냈다. 나는 뿌듯하게도 김포까지 잘 갔고 심지어 제주까지 잘 도착했다.


스마트기기 덕분에 길치여도 다행이다 하면서도 나는 종종 기기가 주는 문명의 혜택과 애증관계가 될 때가 있다. 그런 관계의 틀어짐은 주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발생한다. 한번은 일을 마치고 이어폰을 양쪽에 낀 채 유투브를 보며 지하철에 올라탔는데 역시나, 집과 반대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유투브 영상에 빠져들어있다보니 30분이 훌쩍 지났고, 이쯤 양재역이란 방송이 나와야되는데 조용하기에 둘러본 지하철 3호선은 경기도에 도착해 있었다. 창밖은 유난히 깜깜했다. 밥 먹을 시간이 밀렸다는 분함과 이게 몇 번째냐는 질책으로 이 때의 마음을 담아 브런치에 글도 썼다. 세 번째 지하철을 잘못 타고 보니 글이 절로 써졌다. 나는 도대체 왜 이모양인하면서 말이다. 이런 헤프닝을 길치의 문제로 확대하기 보다는 단순 주의력에 문제라 치부해보려고 하지만, 지하철을 타러 내려오는 계단의 방향이 달라지면 영락없이 방향을 헤매다보니 범인은 주의력이야라고 단정짓기에도 애매하다. 유투브 영상이 너무 재미있어서(?) 문제야, 스마트기기가 문제야라고 하지만 핑계라고 하기엔 부끄럽다. 


종합스코어를 매겨본다면 길치력은 내게 이전보다는 긍정적인 느낌이다. 문명의 발달로 길치가 주는 불편함에서 이전보다는 많이 벗어났거니와 그런 것들에 의지해 초행길을 혼자 다녀본 경험도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가끔 지하철을 반대방향으로 타며 한숨을 푹푹 쉬지만 길치력은 내 뇌를 전부 믿지 말라는 메세지를 담아 자신을 견제하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하니 잘 데리고 살아야겠다.  길치력으로 격상시킨만큼 그것이 주는 양면성과 함께 고군분투해볼 계획이다.




언젠가 당신과 내가 오프라인에서 만난다면 당신이 앞장서 걸어주시길 부탁드린다. 내가 찾아놓은 맛있는 커피집을 당신에게 알려드리고 무작정 당신의 뒤를 따라 걷겠다. 처음 만난 사람의 뒤를 그런 방식으로 따라가는 것이 자주 재미있는 일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허둥지둥 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저를 이해해 주시길.


그런데, 당신도 길치라면? 눈에 보이는 아무 커피집으로 들어가 당신의 길치력이 당신을 어디로 인도했는지 소상히 알려주시길 바란다. 살면서 얼마나 길치짓을 했는지 들려주셔도 좋다. 길치짓이라면 나도 이야깃거리가 한 봇다리니, 분명 즐거울 것이다.     






* 스마트폰으로 글 수정하다 삭제를 또 눌렀습니다... 라이킷 눌러주신 작가님들이 많았는데 속상합니다.

다행히 글이 A4용지로 어느정도 될런지 보려고 한글에 복붙해둔 것이 저를 살렸습니다. '삭제력' 글 하나 써야겠네요ㅠ 이정도면 이제 필히 백업을 해두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