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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Jun 11. 2024

고유성을 넘어 진정함으로

글쓰기에 대한 관점


나를 대표하는 단어를 세 가지‘나’ 이야기해 보라는 친구의 말에 한참 골머리를 앓았다. 처음에는 이렇게 답하면 되겠다 했는데, 고민할 수록 ‘대표하다’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할지 모호해졌다.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고 답해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진 않아도 꾸준히 하고 있는 것? 일상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는 것?      

각 질문에 대해서는 차례대로 독서, 글쓰기, 육아란 답이 떠올랐는데 나를 대표한다고 하기엔 뭐언가가, 약가안씩 부족하단 느낌이었다.


내게 커리어는 육아, 가족 같은 가치에 의해 언제든 대치될 수 있었기에 대표라고 말하기엔 열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 물건들을 사는 일은 특별하지만 각별하진 않았기에 그것도 대표성을 갖기에는 모자랐다. 나는 식도로 들어가는 것에 유난 떠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옷을 입을 때도 눈앞에 보이는 것을 ‘주워’ 입기 때문에 보이는 것에서 대표하는 것을 찾기란 불가능한 듯했다. 송길영 대표의 말을 빌어 표현하면, 내게 '희귀함'들이 쌓여 ‘고유성’을 가진 것이 있겠나 싶었다. 나만의 희귀함도 모르겠는데? 못 찾았다고 말해야겠단 생각으로 고민을 일단락했다.    

   

   

    희귀함이 쌓이면 고유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고유성이 진정성까지 가기 위해서
축적의 시간이 다시 요구될 수 있습니다.
고유함은 나의 주장이고
진정함은 타인의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시대예보:핵개인의 시대』송길영, 교보문고, p.299     


칠레팔레 책이나 봐야겠다 싶어 옆에 놓인 소설을 짚어 들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었다. 독서토론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꾸역꾸역 글자를 읽어 내렸다. 나는 늘 의식을 흐르게 두지만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소설을 읽는 것은 낯선 두려움 그 자체였다. 소설책을 2주나 끼고 있다니. 결국 나는 이 책을 다 읽지 못한 채 독서토론에 참여하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여러모로 영광스럽지 못한 책이었지만 주인공 클라리사의 의식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주제가 내 생각과 참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 주제는 바로 ‘시간과 죽음’이었다.   


사진: Unsplash의Blaz Photo

죽음이라면 나에게도 할 이야기가 없지 않았다. 나와 만나 살아서 집으로 간 환자와 죽어서 간 환자의 수가 비등비등할 것이므로.  레지던트를 마친 이후 줄곧, 척박한 병원환경에서 환자를 ‘각별히 잘’ 임종하게 하는 것이 내 일이었으므로 그 비율은 당연하기도 했다. 병원에서 홀로 임종하는 것을 ‘거악’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임종방으로 환자를 옮겨 가족과 함께 하게 하는 일은 ‘차악’ 수준의 좋은 죽음이긴 했지만 말이다.  


‘좋은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지만 타인의 죽음을 겪는 것이나 떠올리는 일이 즐겁지만은 않았기에, 나는 글을 썼다. 일을 하며 느낀 희로애락을 글에 담아 봉인해 두고 한 동안 꺼내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플랫폼 브런치스토리에 <임종방 찬가>라는 제목으로 12편의 글을 써서 납골당에 유골 모시듯 보관해 두었다.


이젠 작가와 독자가 함께 큭큭거릴 재미있는 글을 써보겠다 다짐했다. 지난 4월부터 브런치를 다시 시작했으니 규칙적으로 쓴 글이 꽤 모여있었다. 브런치에 발행한 글이나 끄적이다 말고 저장한 글들을 습관처럼 살피다,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글들이 한 방향을 향해 머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단어를 향하여 말이다!


내 온 글들은 말하고 있었다.

“너는 죽음에 관심이 많아. 그 영역에서 꽤 오랜 시간 머물렀고. 우리를 직시할 시간이 됐어."


이쯤 되니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내 희귀성이 모여 만든 고유성은 ‘죽음에 대한 생각들’이라고. '죽음'이 현재의 나를 대표하는 단어라고. 모아둔 글들이 없었다면 아마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각자가 '대표하다'라는 말을 해석하는 기준이 다르겠지만, 나는 그 단어가 진정함을 담아낼 그릇이길 바랬나보다. 이렇게 된 거 내친김에 고유함을 넘어 진정함으로 나아가볼까한다. 진정함은 타인의 평가라던데, 그것이 무엇일지 또 죽음이란 영역에 타인의 평가가 들어갈 틈이 어디일진 잘 모르겠다. 지금 아는 것은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밖에.


또 쓰다 보면 알게 되겠지.   




제게 전지적 작가시점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뭘 알고 쓰는건지'란 생각도 자주 들고요. 답을 내렸다 생각했는데, 그것은 다음 질문을 위한 '답 같은 무늬의 문장들'이었음을 발견합니다. 모두 과정이겠죠? 과정의 힘을 사모합니다. 죽기 전 제 한 마디는 명확한 듯 합니다.


"이것도 과정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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