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글을 썼더라면
정문정 작가의 책 <다정하지만 만만하지 않습니다>를 빼곡히 밑줄 치며 읽었다. 저자는 에세이에 관한 글에서 '작가가 쓰는 이야기의 핵심'을 말하며 "숨기고 싶지만 숨겨지지 않는 일"에 대해 쓰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내 삶의 이야기를 쓰는 법>의 저자 낸시 슬로님 애러니의 일화를 들려주며, 작가는 묻는다.
당신의 '소변주머니'는 무엇인가요?
여기서 말하는 '소변 주머니'는
저마다의 실패담이거나 과오이고,
또는 결함이나 콤플렉스거나
트라우마일 겁니다.
작가가 쓰는 이야기의 핵심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숨기고 싶지만 숨겨지지 않는 일에 대해서,
한때는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봐 허겁지겁 덮어두고 불안에 떨었던 일에 대해서...
그 일이 자기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씁니다.
좋은 에세이에는 이 같은 고백이
반드시 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다정하지만 만만하지 않습니다>
정문정, 문학동네, p.65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외 없이 소변 주머니가 달려 있음을 확인하면, 이 두려움이 나에게만 찾아오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신의 소변주머니가 무엇인지 묻는 그녀에게, 나에게는 그다지 '소변주머니'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답했다. 그리고 몇 가지는 이미 글로 쓴 것 같다고 타협하듯 말했다. 그렇게 몇 날이 지나고 '서사의학'이란 분야에 대해 검색하다 작가 낸시 슬로님 애러니를 다시 만났다. 그녀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서사의학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애러니의 책 <내 삶의 이야기를 쓰는 법>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칠마크 글쓰기 워크숍을 설립해 45년간 '마음으로부터 글쓰기'를 운영한 그녀가 책을 통해 말한다.
나는 글쓰기에 어떤 힘이 있는지를 안다.
자신의 관점을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지 안다.
나는 누군가가 들어주는 것,
그것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것이
치료제라는 것을 안다.
책에 공감한 부분을 형형색색으로 칠하며 내가 그때 느낀 것은, '의사로서 완화의료, 호스피스 분야에서 일했을 때, 보호자들과 함께 글쓰기 해보았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소변주머니를 글로 드러냈다면 좋았을 텐데. 샤워 할 시간도 없이 타인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글을 쓰라고 하다니, 그 얼마나 경거망동한 말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다. '글을 쓰는 것이 세수를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 일 수 있다'고 말이다. 의심이 많은 말기암 남편을 죽이고 싶었다던 아내와 십수 년간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가 암을 진단받고 나서야 화해를 청해왔다고, 분노하며 이야기하던 딸이 글을 썼더라면.
타인의 소변주머니를 걱정하다 내 소변주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봐봐 나는 없잖아.
나는 끝까지 모른 척하고 싶었다.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는데 자신있다고 자부했던 의사로서, 실은 그렇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은 버거운 것이었다는 것을. 하나뿐이라 여긴 강점을 내려놓기란 열가지 단점을 드러내는 것보다 어려운 것임을.
말기암이나 중증신경계질환을 가진 환자와, 그들의 보호자들과 장시간 면담하는 일은 사실 내겐 어려운 일이었다. 마구잡이로 글을 쓰고, 그것들을 퍼즐 맞추듯 이어 붙이며 어렴풋이 느꼈다. 스텔라 황 작가의 책 <나는 죽음 앞에 매번 우는 의사입니다>를 읽으며, 비로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환자와 보호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의사'가 되고 싶었던 나는, 그들이 이야기를 꺼내게 함으로써 내 욕구는 충족시켰지만, 그들이 그 이후로 나아가도록 돕진 못했다. 그것까지는 내 소관이 아니라는 듯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스텔라 황은 달랐다. 그 이후까지도 자신의 몫이었다. 울며 스러지는 보호자들과 같은 공간에 있음으로, '공기의 파동으로도 그들을 위로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녀 고유의 앎이 되기까지 그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생각했다. 분명한 것 하나는 그녀의 단단한 힘의 한 축에도 글쓰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내 키만 한 소변주머니를 갖게 될 수도, 한 번에 여러 개의 소변주머니를 차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글쓰기가 있다는 것, 그것의 힘을 알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축복이다. 애러니의 말처럼 글을 쓰며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웃으면서 또 거의 동시에 울 수 있었는지" 끝없이 묻고 답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나아가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위안이다. 글쓰기의 힘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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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 황 작가의 책 <나는 죽음 앞에 매번 우는 의사입니다> 북토크에 참여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회복탄력을 뒷받침하는 데에 "책 읽기와 글쓰기, 그리고 나에게 공감해 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언급했습니다. "사랑이 전부다"라는 말과 함께요.
북토크를 마치고 다른 작가님들이 자신의 쓴 글을 담은 책을 서로에게 선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나누는 일은 모두에게 소중한 일임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대문사진 : Unsplash의Nick Morri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