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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Aug 21. 2024

첫째 주. 고유감각

오리엔테이션

문학창작반 교실문을 열자 각기 다른 세월을 산 근육과 힘줄, 관절들이 보였다.

두리번 거리다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앞 자리에서 머리가 희끗한 언니가 말했다.

 "늙은이 앞에 앉아줘서 고마워."

그녀의 목소리가 발랄해 자리에 앉자마자 즐거워졌다. 내용이랑 목소리톤이 안 맞잖아요 언니.


이건 데자뷔다. 그때도 어린 축에 속했던 나에겐 언니들이 많았다. 그래, 그건 20대 후반 대학원 교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 풍광이었다. 나이는 달라도 이루고자 하는 것이 같았던 사람들의 모임. 나는 투철한 '목적'때문에 앉아있었지만, 하루 8시간씩 수업을 듣다 보면 '고유감각'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 감각은 무의식의 영역이라던데, 아니었나.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힘들지? 그래도 앉아있어. 어어어, 졸았어? 고개 푹 꼬꾸라진 거 바로 잡아줄게. 앉은 자세는 내가 보장한다. 눈은 니가 떠.

몸이 거는 끝 없는 대화로 우리는 그 시간을 인식하고 있었나보다.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저자 올리버 색스는 말한다. 고유감각은 자신이 자신임을 아는 감각 중 하나라고.

그는 그 책에서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를 소개한다. 첫 문단을 읽으며 고유감각을 잃어 자기를 상실한 그녀가 어찌나 비참하던지, 목이 메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다발성신경염으로 잃어버린 고유감각을 살리려 오랜 기간 재활을 하고, 그 끝에 그 감각을 찾... 아내진 못한다. 결핍되어 있던 행동범위들을 시각으로 보완해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책 속 그녀의 이야기는 일단락된다.

그녀가 되찾고자 고군분투했던 고유감각이란 근육, 힘줄, 관절 등 우리 몸의 움직이는 부분에 의해 전달되는 연속적이면서도, 의식되지 않는 감각의 흐름을 말한다. 우리 몸의 위치, 긴장, 움직임은 이 감각을 통해서 끊임없이 감지되고 수정된다. 그러나 무의식 중에 자동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색스가 인용한 학자 셔링턴은, '고유감각'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몸이 자기 고유의 것, 자기의 것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셔링턴, 1996, 1940)


당연한 듯 누리는 이 감각으로 나는 내 몸의 경계를 안다. 자연스럽게 나를 느낀다. 무의식 차원에서 몸을 통해 나를 감각하는 방법이 인류 공통이라면, 의식 차원은 각자가 다르다.  누구는 운동, 누구는 명상, 누구는 글쓰기같은 것들로 말이다. 행동이 빠른 편인 나는(자신에게 이렇게 주입 중이다) 보통 그것을 내가 하는 행동으로 유추한다. 내가 문학창작반에 앉아있는 것을 보니 나에게는 그 방법이 글쓰기인 듯 하다고.  쓰기 위해 앉았을 때 그 모습을 자기라 여기며 내 고유감각과 의식차원의 공조가 자연스럽다. 그렇게 글을 쓰며 '나'라는 경계가 점점 확립됨을 느낀다. 나의 첫 글쓰기는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알아보겠다는 소소한 목적이었지만, 나름의 수확이었다.


그랬던 나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자판을 두드리려고 앉았는데 점점 내 몸이 흐려지는 게 아닌가. 몸이 없는 달하가 되려나. 이전엔 확실하다고 느꼈던 개념들이 모호해졌다. 나를 이루는 경계는 어디일까?같은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런 상태에서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동화, 수필, 시, 소설을 쓴다는 이곳에서 무엇을 해 나갈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첫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같이 걷던 언니가 말했다.

"2시간 앉아있기도 힘들어. 몸이 삐걱거려." 그녀는 삐걱대는 허리로 자기를 인식했다.

그런데 언니 삐걱도 좋은 거예요, 자기를 느끼는 거잖아요. 제가 아는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는 말이죠...

올리버 색스의 책 내용을 인용해 말하려나 말았다.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나를 보고 언니가 운을 뗐다.


"젊을 때..."

'엇 그만, 언니 그 다음에 식상한 말 하시면 크리스티너 얘기 꺼낼 거예요.'

젊을 때...라는 구절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뻔하다고 일괄처리한 내 마음이 태세를 갖췄다. 뻔한 말을 듣기 싫어하는 그가 상대에게 크리스티너의 얘기를 꺼낼 합당한 이유도 찾아냈다. 젊은이와 자기를 비교하는 것보다 크리스티너랑 비교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언니가 말을 이었다.

"젊을 때... 글 많이 써둬요. 일흔이 되니 힘드네요. 그럼 다음 주에 봐요."

"네, 다음 주에 봬요."

크리스티너 얘긴 꺼내지 않기로 했다. 언니의 응원이 고마웠다. 무엇보다 그녀의 표정이, 자신을 젊은이와 비교해 폄하한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 힘을 주려고 자기의 나이를 극적으로 활용한 것일 뿐.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가 누구보다 자신의 고유감각을 충분히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통통대는 발걸음이 말해주었다.


그렇게 몸을 잃어버린 달하와 삐걱거리는 언니가 만났다.  우리는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 12주간 만날 예정이다. 각기 다른 세월을 산 근육과 힘줄, 관절이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지 궁금하다. 내 몸을 되찾을지 기대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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