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살 아래 시원한 바람이 불던 모리셔스에서
안녕 아가야,
엄마에게 5월은 아주 뜻깊은 달이야. 2016년 아빠와 독일, 그리고 한국에서 두 번의 결혼식을 치른 달이고, 2017년 아빠와 함께 1년 늦은 신혼여행을 떠난 달이기도 하거든. '신혼여행은 무조건 쉬러 가는 거야'라며 하루 종일 여유 부리며 놀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섬, 모리셔스로 갔어. 평소에 근검절약이 몸에 뵌 아빠지만, 이번에는 큰맘 먹고 - 인생에 단 한 번 뿐이라는 가정하에 - 아주 좋은 리조트에서 2주라는 시간을 보냈어. 매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야외 레스토랑에서 브런치를 먹고, 해변에서 수영을 하거나 모래사장에 누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어. 뭔가 특별한 것이 필요한 날이면 새벽 일찍 일어나 돌고래랑 수영을 하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산행을 가지도 했지. 매일매일이 천국 같은 시간이었어.
아빠가 태블릿으로 e-book을 읽는 것과는 달리, 사르락 사르락 손에 닿는 느낌이 좋은 종이책을 선호하는 엄마는, 한국에서 가져온 책 중에서도 제일 읽고 싶던 책 두세 권을 골라 여행 짐을 샀어. 그중에 한 권이 류시화 시인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신간이었어. 엄마에게는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며 현자들에게 얻은 진리를 아주 담담한 글로 전해주는 작가님이 마냥 고마운 존재여서, 새 책이 나오자마자 얼른 독일로 데려왔었지. 짤막한 산문들이라 크게 머리 쓰지 않고 바람 좋은 날 벤치에 누워 한 장 한 장 넘기기 좋은 책이었어. 그런데 이 책이, 하필 그 순간에, 엄마의 마음속에 콕 들어오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뭐야.
아프리카 동부의 어느 부족은 아이의 생일을 정하는 그들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아이가 태어난 날이나 잉태된 날이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속에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이 맨 처음 떠오른 날을 생일로 정한다고 한다. 그날로부터 아이의 인생이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자궁이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속에 최초로 잉태된 날이 이 부족 사람들의 생일인 것이다.
(류시화 님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중에서)
너무 우스운 이야기지만, 어쩌면 너라는 존재가 언젠가 엄마에게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매일 저녁 기울이던 술잔이, 아름다운 해변과 바다 위에서 즐기던 운동들이 점점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어. 하루는 모터보트에 튜브를 매달고 달리는 코스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배속에 이미 아기가 찾아왔으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보트를 몰던 아저씨께 천천히 가달라며 소리를 쳤어. 당연히 스피드를 즐기는 아빠는 버럭 화를 냈지. 무서우면 처음부터 타지를 말았어야지 천천히 갈 거면 이 걸 왜 하고 있냐며 말이야. 임신이라는 가능성은 아주아주 작은 날이었지만, 엄마 마음에는 이미 네가 들어와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1년 뒤, 4월 말부터 거세게 발차기를 해대더니, 병원에 누워 너를 하루라도 더 품고 있으려고 최선을 다하던 엄마의 노력이 무색하게, 이든이 너는 예정일을 2달이나 앞둔 2018년 5월, 엄마의 품 속으로 들어왔어. 독일로 돌아가서도 한 참을 잊고 있었는데, 그렇게 너의 생일은 5월이 되어야만 했었나 봐. 벌써 여러 해가 흘러 어느새 4살이 된 더는 따박따박 엄마 말에 '왜?'와 '아니?'를 달고 살지만, 엄마는 너를 마음속에 품은 그날부터 한 순간도 빠짐없이 심장이 아프도록 너를 사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