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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min Shin Oct 09. 2023

[TW] 03. 나는 죽은 자와 함께 걷는다

"특히 시간의 경계나 제한이 없는 안무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무용 작업이 전시라는 매체에 적용될 수 있는 프레임이었습니다. 전시장에서 관람객은 이동의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는데 무용 공연이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 선택한 시점부터 볼 수 있거나 전시와 같은 긴 시간을 점유하는 작업이 등장한 것입니다."

-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 춤추는 미술, 김해주, 웹진 춤:인, 2019년 11월 13일


위는 2019년 서울무용센터와 웹진 춤:in이 공동 주최 및 주관하고 영리한 땅의 협력으로 진행되었던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 중 큐레이터 김해주(당시 아트선재센터 부관장)의 렉처 '춤추는 미술'의 기록에서 발췌한 문장들이다. 주로 극장에서 행해졌던 무용이 시각예술에 기반한 미술관이라는 장소로 들어온 전반적인 역사적 흐름을 소개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현재 미술관에서 발생하는 퍼포먼스를 읽는 방향을 제시했던 본 렉처에서, 위 문장은 90년대 중반 이후 무용과 안무에서 나타난 여러 변화의 갈래 중 하나를 설명하고 있다. 즉, 일방향적으로 흐르고 정해진 러닝타임으로 국한되는 시간성에서 벗어나고자 한 안무는 극장 공연의 형태에서 전시의 형태로 작업이 선보여지는 장소를 이동시켰다고 볼 수 있다. 


9월 22일부터 진행된 서울익스프레스의 전시 《나는 죽은 자와 함께 걷는다》는 작년 동명의 공연을 전시 형태로 바꾸어 보여준다. 작년 동명의 공연에서 보여준 사회적으로 타자화된, '좀비'라 칭해지는 인물의 서사를 보여주는 내용적 맥락은 동일하나, 극장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시간성을 가지는 전시는 관람자를 행위 주체로 한 분절되고 비선형적인 서사의 실험을 가능케 한다. 이는 앞서 무용 및 안무가 제한된 시간의 경계와 제한에서 벗어나고자 미술관이라는 장소를 택했듯이, 선형적 타임라인에서 벗어난 '포스트 타임라인'을 지닌 '미극장'의 모습으로 '분절된 서사'를 염두에 서울익스프레스의 시간성과 서사에 대한 실험이라 볼 수 있다. 


아래는 서울익스프레스의 전시  《나는 죽은 자와 함께 걷는다》를 위해 쓴 글이다. 


어디론가 걷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 ㅡ 뒷모습으로 추정되는 신체의 일부 ㅡ 이 화면에 나타난다. 뚜렷한 목적성 없이 초월적 이끌림에 의해 끊임없이 걷고 있는 인물. 그에 대한 인상은 걷기 외에는 다른 복잡한 행동을 하기 어려운 좀비와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내레이션을 하는 화자가 누구인지 작품 속에서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아이’, ‘남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화자는 아이의 엄마로 추측된다. 좀비 혹은 죽은 자라 불리는 화자는 실제로 사망한 인물일 수도 있고,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여겨지는 상태에 놓여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서울익스프레스(전유진, 홍민기)의 전시 《나는 죽은 자와 함께 걷는다》에서 그가 실제로 생물학적 죽음을 맞이했는지 아닌지의 사실관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좀비화’는 타자화의 은유로, 즉 특정 집단에 의해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표현할 때 종종 사용된다. 좀비라는 단어가 출현한 배경이 인종주의에 근간한 서구인의 배타적 타자화에 있다는 점을 인지할 때 이러한 은유가 이해될 수 있다. 화자를 생물학적 또는 사회적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그를 타자화한 이들일 수 있다. 혹은, 화자가 스스로 선택한 좀비화일 수도 있다. “그렇게 나는 모든 세속적인 욕망에서 자신을 지키고, 온갖 시기와 질투의 감정에서 자신을 해방합니다”*라는 화자의 발언에 따르면, 자발적 좀비화는 그의 해방적 수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작년 노들섬에서 있었던 동명의 퍼포먼스에서는 언리얼 게임엔진, 사운드(화자의 내레이션), 그리고 트레드밀 위 퍼포머의 움직임을 동기화해, 내레이션의 감정 묘사와 가상현실에서 구현된 장면으로 화자가 처했던 상황을 관람객이 상상하도록 유도했다. 게임엔진으로 제작한 영상은 기존의 미디어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을 가장 몰입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화면 구성이기에, 작가가 의도한 경험을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었던 기술적 선택이었다. (퍼포먼스 중 화면의 시점이 관찰자적 시점으로 변화하는 일부 구간이 있는데, 이는 주인공이 배타적 타자화를 겪는 상황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이를 수동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입장을 강조한 듯 보인다.) 한편 1인칭 화자를 따라가다 보면 제한적 시선에서 상황을 상상하게 되고, 화자의 기억에 의존해 파편적으로 상황을 인지하게 된다. 따라서 올해 더 윌로(The Willow)에서 열리는 전시는 화자를 좀비화된 상태에 이르도록 한 배경적 요인을 추측할 수 있는 여러 단서를 곳곳에 배치한다. 이전 퍼포먼스에서는 관람객이 주인공 시점으로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관찰자의 시점에 위치한 관람객이 화자가 좀비화한 경위를 추적해 파편적으로 제시된 화자의 서사를 채워나가도록 유도한다. 공연적 성격의 퍼포먼스가 벌어지는 공간을 전시장과 대비되는 상대적 의미에서 극장이라 지칭할 때, 궁극적으로 이러한 시도는 전통적 극장의 몰입적이고 집약적인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공연에 비해 상대적 시간성을 갖는 전시 형식을 선택했다고 읽힌다. 공연의 절대적 시간성에서 나와 비선형적이고 분절된 서사로 분해된 요소들은 관람 주체를 통해 작가가 말하는 ‘서사의 타임라인을 해방’하는 형태로 ‘미래의 극장’을 향한 하나의 실험을 구성한다.


한 쌍의 트레드밀에는 자동화된 움직임에 화자의 말과 시점을 동기화해 반복적으로 제시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어있다면, 나머지 한 쌍의 트레드밀은 관람객이 직접 움직여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는 이전보다 더욱 개인화된 몰입 환경에서 화자의 말과 시선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한편 그 밖의 단서로, 화자의 세계관이 학습된 인공지능과 대화할 수 있는 채팅창은 좀비화되어 실존과 가상의 사이에 놓인 화자와 대화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생성형 AI를 활용한 시적 생성기(Poetry Generator) <내가 꿈에서 본 것>은 파편화된 화자의 발언에서 시작해 텍스트와 이미지가 상호 관계성을 가지며 무한히 생성된다. 언뜻 주어진 기존의 서사와 논리적인 연결성을 가지지 못하는 듯 보이는 이미지와 텍스트이지만, 이는 자동 생성된 개념적 매체가 관람 주체를 통해 기존 서사와 관계를 맺고 의미화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앞에서도 언급된 작가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서사성 실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쪽에 위치한 사운드 인스톨레이션은 화자를 배타적 타자화한 이들의 발언을 무작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밀리미터의 정교함’*으로 만든 짜임새 있는 인물의 세계관에 사운드를 활용해 날카롭게 개입하는 방식에서, 작가 전유진, 홍민기라는 서로 다른 매체를 주로 사용해왔던 두 작가가 테크놀로지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주축으로 호혜적으로 작업하는 공동창작의 방식이 드러나는 점이 특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또한 서울익스프레스는 문화적 코드인 대중음악을 기존의 차용과 다른 방식으로 가져온다. 현대미술사에서 대중문화는 주로 시대성을 대변하는 상징적 기호로 쓰이거나 고급문화로 여겨져온 예술의 권위에 반하는 안티테제적 요소로 차용되어왔다. 그러나 서울익스프레스가 대중음악을 사용하는 방식은 여기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다. 공유된 대중적 감수성을 지니는 대중음악은 화자의 서사와 관람객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는 장치로 작용하며, 동시에 화자의 서사에 몰입한 관객이 들려오는 대중음악 속 가사에 화자의 시선을 대입함으로써 대중음악을 새롭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기존 퍼포먼스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통속적 주제를 내포했던 대중음악의 변주가 화자의 서사와 만나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의에서 벗어났듯, 이번 전시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차용된 대중음악이 숨어있다.


앞선 여러 형식적 실험들 사이에서, 내용적으로 화자의 태도는 꽤 일관적이다. 발화 곳곳에서 드러나는 냉소적인 말투는 사회 전반에 대한 회의주의적 시선을 형성한다. 화자는 먼저 알고리즘적으로 체계화된 행동 양상을 보이는 공동체에서 보편과 규격에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이들 ㅡ 화자를 포함한 ㅡ 을 언급한다. 마치 문제없이 체계화된 행동 양상을 따르는 듯 일상을 연기해야 하는 그들의 피로감을 대변해 체념하는 듯한 어조로 표현한다(“우리는 최대한 평범하게 보이도록 노력합니다”*). 또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본인의 상황을 자조적으로 언급하며, 자본주의적 권력관계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화자는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묻는다.

“자, 이제 너희 신에게 물어보렴, 우리 중 누가 영혼이 없는지를.”*



*해당 문장은 <나는 죽은 자와 함께 걷는다> 퍼포먼스의 대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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