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emin Shin Aug 26. 2023

비난의 방향을 올바르게 설정하기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1978)에서 부가적인 의미가 더해지지 않은 질병 그 자체로 질병을 말하기를 제안한다.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 어떤 도덕적 낙인, 낭만적 의미 같은 부가적 의미를 부여하는 은유는 질병을 질병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치료를 향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환자의 의지를 방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성병에 대해 어떤 도덕적 낙인을 부여한다거나, 우울증에 대해서 어떤 낭만을 부여하는 은유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삶이 불행하고 우울해야 글을 쓸 수 있다ㅡ는 우울증에 대한 낭만적 은유는 20대의 나를 일부 점유했던 질병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조현병 치료 중단 기록' ㅡ 최근 우후죽순으로 발생하고 있는 무차별적 범죄에 관한 몇몇 보도의 헤드라인에서 반복적으로 눈에 밟히는 문구이다. 며칠간 매일같이 뉴스 1면에 등장하는 관련 헤드라인을 접하면서 마음속에 짐처럼 자리하고 있는 불편함을 풀어보고자 글을 쓰고 있다. 이 불편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부터 살펴보자. 불편은 '조현병'이라는 정신 건강의 병리적 현상이 범죄의 원인인 것처럼 명시하고 있는 몇몇의 헤드라인에서 시작한다. 언론 보도의 헤드라인은 구구절절 그 문제의 복잡성을 설명할 수 없고, 수 초 안에 독자의 시선을 끌어 클릭이라는 행위까지 유도해야 하기에 불가피하게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다고, 언론에서는 변명하는 입장을 취할지도 모르겠다. 보도의 특성상 나타나는 자극적 제목의 문제점을 일부 언론들 내부에서도 인식하고 있는지, 뒤따르는 몇몇 후속 기사에서는 정신질환과 범죄의 상관관계가 매우 낮음을 과학적 증거와 통계수치를 들어 설명한다. 그러나 후속 기사가 1면의 헤드라인에 걸리는 확률이 낮은 것은 ㅡ 타자화된(Othering) 비난의 대상을 만들고 싶은 대다수 독자의 욕구가 반영되지 않았을까.


발간된 지 50여 년이 지난 수전 손택의 저서가 2023년에 여전히 소환되는 이유이다. 인간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탓하고 비난할 대상을 필요로 한다. 실제로 문제를 발생시킨 원인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다수의 불안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말이다. 과거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을 생각해 보자. 실제로 마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현재의 인류는 모두 알고 동의하고 있는 사실이다. 발생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을 때, 비난의 대상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이처럼 오랜 역사 안에서 다수의 시민이 불안한 상태를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타자화된 특정집단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정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으로 여겨져왔다.


최근 집중을 어려워하고 종종 과다행동을 보이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을 때, 불현듯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스쳤다. 그리고 곧 이어 다음과 같은질문들이 떠올랐다. 무차별적 범죄로 시끄러운 최근에,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마주했을 때 경계해야 할까? 그를 보면서 내가 공격받을 수도 있다는 심리적 공포감을 느끼는 게 당연한 것일까? 정신 건강의 병리적 현상을 보이는 이들을 마주할 때 뒤따르는 감정들 ㅡ 나와 다르다는 이질감을 느끼며 타자화하는 마음,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경계의식, 공격성을 보일 수도 있다는 공포감 등은 수전 손택이 말한 질병에 더해진 부가적인 요소들, 은유일 것이다. 조현병은 정신병리학에서 연구되는 정신 건강의 병리적 현상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여러 보도는 범죄의 가해자가 조현병 진단을 받은 기록이 있다 하여 조현병이라는 하나의 질병에 '사회 악'의 프레임, 공포, 해악과 같은 부정적 은유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부정적 은유는 환자와 환자의 가족이 질병을 감추고 부정해 치료를 저해할 수 있으며, 타자화된 환자 집단을 사회에서 더욱 소외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 뿐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정말로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할 대상을 가린다.


무한히 생성되는 이미지 속에서 끝없는 소비가 조장되는 사회, 나의 소비를 전시하는 게 일상이 된 사회 안에서 개개인이 겪는 상대적 박탈감이 개개인의 문제로 여겨진다. 하지만 여러 개개인이 공통적으로 병리적 양상을 보인다면 그건 공통의 사회 문제이지 않을까. 또한 공격성을 조장하는 혐오 사회에서, 국가는 혐오 양상을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한다. 아나키즘을 다룬 로버트 노직의 저서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에서 로직은 "국가는 최소 국가(시민을 폭력이나 범죄로부터 보호하고 계약 실행을 지원하는 데 그치는 국가)일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고, 그 이상 확대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결론짓는다(아즈마 히로키 <관광객의 철학>에서 재인용). 로직이 주장한 무정부주의, 아나키즘에서조차 국가는 시민을 폭력이나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최소한의 역할은 수행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국가 정책에서 시민은 얼마나 고려되고 보호받고 있는가.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유사 무정부 상태를 보이는 현 현상에 대해 보도한 최근의 한 TV 탐사 프로그램의 내용이 스친다. 시스템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개개인에게로 책임이 전가된 최근 일련의 큰 사건들이 최근 발생하는 범죄들과 그에 대한 각자도생식의 대응으로 이어지지 않는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비난의 대상을 찾고자 한다면, 개개인의 질병보다는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길 제안한다. 시스템은 종종 개개인의 뒤에 숨어 그 잠재된 문제를 드러내지 않곤 한다.


다시 질병에 대한 은유로 돌아가 ㅡ 우울에 관한 은유는 글을 쓰고 싶은 나를 한동안 불행 속에 머물고 싶게 했다. 내가 덜 불행해 글을 더 잘 쓸 수 있는 다양한 관점, 소재, 계기가 부재한 걸까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곤 했다. 행복하면 글을 쓸 수 없을 줄 알았지만, 삶이 안정된 지금 ㅡ 오히려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검토해 볼 수 있는 메타적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시선 말이다. 글을 쓰지 못했던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는데, 우울은 근원을 가리고 나 역시 그동안 비난의 대상을 엉뚱한 곳에 두었던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TW] 02. 팔/발/말: 랜덤 노이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