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들고 가는 날.
약속되지 않은 약속들이 있다. 나는 이런 날들을 기다린다. 하지만 이런 날들은 손에 꼽을 일이고, 부러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나와 히스 씨가 찾아가는 어느 곳에는 '술 들고 가는 날.'이 있다. 사장님이 휴일을 반납하고 일정 금액의 자릿값만 받고 손님들이 술을 들고 가서 셰어 하는 날이다. 뭐 물론, 가져와서 셰어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지만, 우리야 같이 마시는 걸 좋아하는 외로움 많은 술쟁이기에 다른 사람들과 잔을 주고받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다.
와중에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한다지만, 조금의 북적거림도 좋아한다. 사실, 너무 조용한 것도 너무 북적이는 것도 싫다. 적당한 소음과 적당한 말상대.
아니 나와 '짠'을 해줄 사람들이라면 조금 많다 싶은 것도 나쁘지 않겠다.
주종은 딱히 정해져 있지만 않지만 주로 와인이나 위스키이며 간혹 꼬냑이나 바이주 등을 가져오는 사람도 있다. 가격대는 다들 눈치껏.
내가 가장 선호하는 주종은 위스키이지만 와인을 마시는 것도 좋아한다. 와인을 즐기게 된 건 비교적 얼마 안 됐는데 참 헤프고 즐거워지는 술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위스키가 더 좋은 건 가장 깔끔한 술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설명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뒤끝이 가장 깔끔한 주종이다.
아무튼 즐거움이 고픈 오늘은 이탈리아 레드 와인을 들고 왔다. 눈에 띄는 하트 모양의 장식은 순은의 아트 라벨로 매년 세계에서 주목받는 이탈리아인 작가의 작품으로 와인의 이름 또한 라벨을 제작한 작가의 이름이다.
비주얼부터가 사랑스러운 이 와인은 이탈리아의 베테토 지역에서 생산된 포도로 만들어졌다.
비네 아르젠티 1998 체리베르티 델레 베니스.
은은한 과일 맛에 우아한 나무의 향이 더해졌다는 설명이다.
느지막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들이 있다. 지인의 옆에 자릴 잡고는 술을 올려두니 사장님이 와인 잔을 가져다주신다.
앉자마자 짧은 인사가 오고 갔다. 따라진 와인을 한 모금마저 보니 시간을 두고 마셔볼 일이다. 분명 더 맛있어질 테다. 기다리는 동안 위스키 하이볼을 한 잔 해야겠다.
이유는 없고 손에 잔이 들렸으니 '짠'.
옆 손님이 가져온 위스키를 권해서 또 '짠'.
잠시 뒤에 들어온 손님은 샴페인을 가져왔다.
마트에 들렀는데 틴 케이스가 마음에 들어서 샀단다.
'그거 맛있는 와인인데...'
입맛을 다시기 무섭게 샴페인 이 담긴 잔이 내 앞에 놓였다.
아무튼 또 '짠'.
어느새 앞에 놓은 레드와인의 맛이 한껏 올라왔다.
지금이 적기인가!
'짠'.
그런데 와인잔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얇고 얇은 이 귀한 잔이 깨질 위험이 있으니까.
웬만하면 와인잔을 잘 부딪히지 않는다.
그냥 잔을 들어 올리고 부딪히는 시늉만 할 때가 많다.
왜냐면, 이 잔은 비싸거든.
.
.
.
나는 짠하기를 좋아한다.
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무튼 나는 좋아한다.
그러고 보니까 내 짝꿍은 짠을 하기보다 그 시간에 한 마디라도 더 말하기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 조용한 거 좋아하는 거 맞나?
모르겠다.
이제 막잔이다.
'짠!'
갈까 하는데 쓱 하고 사장님이 샴페인을 한 병 꺼내든다.
'짠!'
나는 낭만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