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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Nov 02. 2017

내 글을 버리며

황선미 '첫 꽃을 버리며'를 읽다가

안타까운 기다림 없이는 꽃도 열매도 나에게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가는 중이다. 꼬챙이 같은 나뭇가지에 피어난 단 하나의 꽃. 이렇게 기특하고 가슴 저린 꽃은 처음이다. 이 맨숭맨숭한 나무 속 어디에 이런 기억력이 숨어 있었을까. 안도하는 숨결 같은, 첫사랑의 설렘 같은, 분홍색의 완성 같은 꽃을 드디어 보는구나. 손끝이 떨렸다. 혼신을 다해 피었을 첫 꽃이건만 따버려야 한다. 아직은 키가 자라야 할 때, 아직은 굵어져야 할 때, 아직은 뿌리를 뻗어야 할 때라서. 너무 일찍 어른인 척하지 말고 충분히 자라라고. 첫 꽃을 버리며 기원한다. 튼실한 나무가 되어라. 좋은 열매들의 어머니가 되어라.
 
황선미 <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 '첫 꽃을 버리며'


얼마 전 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에서 낭독을 듣고 바로 책을 샀다. 알고 보니 황선미 작가의 첫 번째 에세이였다.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작가의 말부터 천천히 아껴 읽었다. 이미 대작가로 불리는 분인데도 제 글을 부끄럽다 하신다. 써 내려간 문장마다 겸손하고 따뜻한 마음이 묻어난다. 나는 쉽게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마음에 새기고픈 이야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종종 질투가 날만큼 글 잘 쓰는 젊은 작가들을 발견한다. 나는 몹시 작아진다. 내가 너무 부족하고 별 볼 일 없는 작가 같아서. 그리고 아쉽다. 더 젊었던 날 더 열심히 글을 써볼걸. 더 빨리 내 글을 써볼 걸 하고. 모든 가정에 '더'라는 부사를 보탠다. 마음속에 질투와 후회와 욕심과 자괴감이 어지럽게 회오리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이 든 작가들의 글을 읽는다. 오정희, 박완서, 이금이, 사노 요코, 메리 올리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그들의 글을 읽으며 글 쓰는 사람으로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물론 나는 그들처럼 대단한 필력을 가지진 않았지만 (미래에도 그럴만한 자신은 없지만), 글을 쓸 때의 마음가짐 같은 것들은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글에는 변치 않는 것들이 있다. 따뜻한 시선, 소박한 마음, 순수한 행복, 부끄러움과 정성 같은 것들.


닮고 싶다. 훗날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서도 그런 마음으로 글 쓰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은 서두르는 대신에 정성을 다해 써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몇 번이고 실패할 부끄러운 글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할 부끄러운 내 글을 오늘도 노트에 버리며 바란다. 너무 일찍 작가인 척하지 말고 충분히 자라라고. 천천히 영글어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라고. 나도, 내 글도.


'안도하는 숨결 같은, 첫사랑의 설렘 같은, 분홍색의 완성 같은' 복숭아꽃.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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