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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Mar 15. 2018

기적이 찾아왔다

글을 쓰기 시작하고 만난 몇 번의 기적

이들도 저마다의 사연과 삶이 있겠지. 모두가 착하지 않아도, 모두가 친절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꼭 보이는 얼굴이 전부는 아니니까. 무표정으로 종종걸음을 걸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 스쳐 가는 타인들에게 나는 무한한 애정을 느꼈다. 경이로움도 함께.
아마도 우린 이렇게 우주를 만드는 걸까. 혼자라도 좋았다. 무수한 사람들 속에 포함된 하찮은 존재라도 좋았다. 나는 작고 작은 우주 알갱이가 되어 두둥실, 무중력으로 걷는 기분이 들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는 이런 기분을 거의 매일 느끼고 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 고수리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나의 첫 번째 책이 태어난 지 두 살이 되었다. 평소에는 부끄러워서 잘 펼쳐보지 못하는 내 책을, 오랜만에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어 보았다. 마지막 글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다'를 읽었다. 버스와 지하철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글이었다. 겨우내 원고를 쓰고 책을 마무리 지을 때쯤, 작가의 말에 해당할 법한 이 글을 썼었다. 책이 나오고 이듬해 봄. 나는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작가님, 284쪽에 나와 있는 여자애가 저인 것 같아요."


마지막 글에 등장했던, 지하철에서 아주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던 여학생이 나에게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고. 자신이 그 여학생이 분명한 것 같다고. 얘기를 나눠보니 시기와 상황, 당산행 전철까지 모두 들어맞았다. 소현이라는 이름의 여학생이었다.


지하철에는 제법 사람이 많았다. 아주머니 한 분이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 탔다. 그러자 앳된 얼굴의 여자애가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아니야, 괜찮아." 손사래 치는 아주머니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짐 많으시잖아요. 앉으세요." 엉거주춤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는 머쓱한 듯 눈을 감으셨다. 여자애는 책을 꺼내 들었다.
두어 개의 역을 지나고 당산역, 지하철이 한산해졌다. 아주머니의 옆자리가 비었다. 그런데 아주머니, 번쩍 눈을 뜨시더니 여자애의 손을 잡아끌고 옆자리에 앉히셨다. 둘은 잠시 눈을 마주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마침 철교를 지나는 지하철 창밖으로 한강이 펼쳐졌다. 햇살이 쏟아졌다. 겨울 빛은 따뜻했다. - 284p


어느 작가가 전철에서 만난 누군가의 이야기를 쓰고, 그 글이 작가의 첫 번째 책에 실리고, 그 책을 그때 그 누군가가 읽게 될 확률은 얼마일까. 게다가 이 글은 책의 마지막 글. 끝까지 읽은 사람만이 알 수 있었다. 책을 읽고 자신을 알아보고 작가를 찾아 메시지를 보낼 확률. 그것까지 더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걸까.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기적이 일어난 후에,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쉽게도 다시 연락을 주고받는 일은 없었다. 다만, 소현 씨는 내 책을 두고두고 읽어볼 것이라고 했고, 나는 소현 씨의 이름을 마음속에 간직하겠다고 했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소현 씨에겐 단 하나의 특별한 책이, 나에게는 단 하나의 특별한 이름이 생겼다. 우리는 유일한 무언가를 하나씩 마음속에 품고 살아갈 것이다.   


생일 축하해, 나의 첫 번째 책.


며칠 전에도 나는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어느 독자에게 책 선물을 받았다. 내가 책을 내기도 전인 3년 전부터 꾸준히 내 글을 읽어주던 민주라는 이름의 여대생이었다. 우리는 두어 번 메일을 주고받았고, 책 선물을 드리는 감사 이벤트에 민주 씨가 선정되어 내 책과 메모를 보내드리기도 했다.


편집자의 꿈을 꾸고 있다던 스무 살의 그녀는 어느덧 스물두 살이 되었다. 민주 씨는 지난해 국문과 문집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문집이 완성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참여해 만든 첫 번째 책을 나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영광이라고 했고. 그래서 도착한 선물 상자에는 민주 씨의 손편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작가님, 제가 오롯이 만든 책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편집에 참여한 문집이 나왔어요. 제가 맡게 된 부분에서는 작가님의 글처럼 따스함과 공감, 위로를 담고 싶었어요. 저의 눈에만 보이는, 제가 참여한 곳곳의 부분들이 있는데. 그걸 사람들에게 모두 알릴 수 없다는 걸 배우게 된 것 같아요. 좋은 글이 담긴 책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도 알게 됐고요. 다시 한번 따스한 글이 담긴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했어요. 언젠가 편집자로서 작가님을 만나게 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상상합니다."


민주 씨의 편지를 몇 번이나 읽었다. 처음 느껴보는 마음이 내 안에 잔잔히 퍼져나가는 걸 느꼈다.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생각했다. 이 또한 기적이었다. 나는 민주 씨가 꼭 편집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좋은 편집자가 될 것이다. 우리가 작가와 편집자로 만날지도 모르는 기적이, 가까운 미래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어째서 내 삶은 기적투성이일까.

글을 쓰기 시작하고부터인 것 같다. 글을 쓰면서 나는, 지난 과거와 화해하고 타인들을 바라보고 세상을 조금 너그럽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자 자주 기적이 찾아왔다. 생각보다 유난스럽지 않게, 별일 없는 하루처럼 평범하게.   


내가 좋아하고 닮고 싶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말했다. 세계는 풍요롭고, 일상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우며, 생명은 그 자체로 기적이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삶을, 우리는 짐작하고 있다고 해도 마음을 쓰지 않으면 느낄 수가 없다. 나는 글을 쓰면서 깨닫고 있다. 글을 쓰는 일은, 마음을 쓰는 일이라는 걸 실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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