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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Jul 17. 2015

금요일의 모네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바람에 흔들리는 포플러

몇 해 전 가을, 나는 서울행 기차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죠. 나는 그날을 기억합니다.


기차에서 바라본 창밖에는 포플러가 늘어서 있었어요. 높게 뻗은 나무는 황금빛이었습니다.


포플러들.

황금빛과 바삭 마른 나뭇잎의 질감은 저녁과 어울리죠. 직사각형 기차 창문에 길게 늘어선 포플러는 원근감도 없이 그냥 서 있었어요. 내가 화가였다면 이렇게 특징 없는 구도를 어떻게 표현한담 난감했을 거예요. 생김새도 키도 비슷비슷하더랍니다.


기차는 움직이고 있는데 포플러는 그냥 포플러들이에요. 나는 어디에 있나요. 내가 움직이고는 있나요.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요. 하긴 그래요. 우리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시간은 지나가고 있어요. 내가 가만히 서서 꾸물거리는 동안에도 시간은 그녀를 데리고 멀리 떠나갔습니다.


처음에 나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묻고,

"저기 계시잖아요."라는 간호사의 대답을 듣고,

처음 보았던 그녀가 틀림없음을 알고 나서야 다시 걸어갔습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작아져 있었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을 맞췄습니다.


"저 누군지 알겠어요?"


그녀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갑작스럽게 눈물이 났어요. 나는 화장이 번질까 봐 그녀가 볼까 봐 눈을 깜박깜박, 다시 눈물을 넣어뒀습니다. 어떤 말도 반응도 없는 그녀는 다 모를 것 같아도 다 알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슬픈 얼굴을 보이면 안 되죠. 나는 예뻐야 해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웃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깜박, 내가 누군지 기억이 날 때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가,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눈을 깜박이다가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돌아갈 때까지 등을 돌린 채 아기처럼 누워서 잠만 잤어요. 나는 그녀의 조그마한 발을 조물조물 만지고 꽈배기랑 두유를 맛나게 먹고 나선 "저 갈게요. 또 올게요."라고 인사했습니다. 등을 돌린 그녀는 대답도 없이 다시 눈을 감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문을 나섰습니다.



그녀는 파란색 고무 쓰레빠를 신고 있었어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던 부서진 우리 집을 그 밤에 혼자 달려왔습니다. 그 남자의 멱살을 잡고 욕을 퍼부으며 울던 그녀는 그 남자의 난동에 뒤로 벌렁 넘어졌죠. 그녀는  자리에 주저앉아 슬프게 . 이 가여운 거, 이 불쌍한 거, 이 복 없는 거. 아이고, 불쌍해서 어떡하나. 내 등을 마구 때리면서 그렇게나 울었어요. 그녀의 고무 쓰레빠 한 짝이 저쪽에 나자빠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너무나 서럽게 울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 기억이 제일 슬프네요.

할머니, 나의 할머니.  


사는 거 바쁘다고 나는 또 이렇게 늦게 찾아왔어요. 제가 너무 늦게 왔어요.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돈이라도 더 준비해서 드릴 걸 해도 더 드릴 게 없네요. 조금 더 안아드릴 걸 해도 그녀는 돌아눕습니다. 조그마한 그녀의 발을 조물조물 만져주던, 내 조심스러운 슬픔과 후회와 사랑. 그런 거 있죠. 말로 표현 못 하는 그런 감정들. 그거라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Claude Monet. 바람에 흔들리는 포플러.


할머니, 이건 서양화가 모네의 그림이에요.

파란 눈의 서양화가가 그린 외국의 풍경 그림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포플러'를 그린 거예요. 당신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끝없이 서 있을 것만 같던, 눈이 시릴 정도로 슬프게 빛나던, 그 후회의 포플러 보단 이 포플러를, 이 우아한 서양화에 서 있는 포플러를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우아하지만 아주 강렬해요.


이상하게도 나는 처음 이 그림을 보자마자 포플러가 바다와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바다 같아요. 희고 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죠. 해녀였던 당신이 평생 헤엄치며 전복 해삼을 따던 그 바다 같았어요.

할머니, 바다는  항상 슬픈가요? 바람에 흔들리는 모든 건 이렇게 슬픈가요?



둥 둥.


당신이 바닷속에서 튀어 올라 전복, 해삼, 미역 따위를 넣고, 몸을 의지하던 그 테왁 같은. 희망 혹은 생명력을 꽈악 붙잡아요. 온종일 물질을 하고 무거운 망사리를 끌어올려 뭍으로 나오던 저녁처럼, 당신의 생生의 저녁은 무겁고 고단하지만 보람되고 아주 기쁩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목, 석양이 지는 그 바다는 참 아름다웠죠.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하루의 저녁은 언제나 그렇게, 당신의 등 뒤로 아름답게 펼쳐졌어요.


할머니,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당신의 삶은 나 말고도 기억할 것들이 많으니.

당신은 딸들의 '엄마'로 기억될 겁니다. 당신이 작아질수록 당신을 마주한 은 이제 더 자주 울 거예요. 하지만 그게 꼭 슬퍼서만은 아니라는 걸, 당신은 이미 잘 알고 있죠. '엄마'는 원래 그래요. 눈물 나요. '엄마'라는 이름은 언제나 우리를 울게 만들죠.


아, 당신은 이토록 마음 퍽퍽한 이름인가요.
당신의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웠길래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이렇게 울 수 있을까요.

당신의 황혼은 외롭지 않아요. 그러니 그만 슬퍼해도 돼요, 할머니.


깜박, 당신의 기억이 돌아올 때마다.

깜박, 떠오르는 슬픈 기억들 때문에.

깜박, 밀려드는 서글픈 후회 때문에.

깜박 깜박 깜박. 그렇게 눈물에 얼굴을 묻지 마요.


나는 당신이 웃을 때, 그때가 참말로 좋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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