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한다는 건, 살아간다는 것

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를 보고

by 고수리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 아주 좋았다. 연출과 극본, 음악, 배우들 연기까지 모두 좋았다. 모든 등장인물에게 애정과 연민을 느꼈고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 버릴 것 없이 마음에 남았다. 내게 인생 드라마로 남아있는 <네 멋대로 해라>의 향기가 느껴졌다. 이야기의 깊이는 그보다 더 깊었던 것 같다. 드라마는 건물 붕괴 사고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을 현실적이고도 집요할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냈다. 무너진 삶이지만 그 속에는 따뜻한 시선과 인간애가 담겨 있어서, 매회 울면서 봤다.


소설 <피프티 피플>이 자주 겹쳐져,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그 구절을 곱씹었다. 드라마를 보며 생각했다. 멀게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가까이는 세월호 참사와 최근 제천 화재 참사까지.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살았던 거 아닐까. 희생자는 고인들만이 아니었다. 생존자와 유가족, 건물을 세우고 배를 만들고 움직였던 모든 이들까지. 살아남았지만 상처와 상실, 죄책감을 품은 사람들 모두 희생자였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 오프닝 타이틀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기쁘지만은 않았다. 현실에서의 우리 삶은 엔딩이 없으니까. 여전히 슬픔과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우리 곁에 있다. 매회, 아름답고 행복한 주인공들 모습 대신 부서진 지 오래된 폐허 장면을 길게 비추던 드라마 오프닝 타이틀을 보며 생각했다. 단지 운이 좋아서 무사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폐허처럼 무너지고 비참한 삶의 이면을 기억해야만 한다.

누군가 그랬다. '기억한다는 건, 싸운다는 것'이라고. 지겹다, 외면하고 싶다, 그만하면 됐다. 그런 말들에 내몰리고 무뎌질 때, 우리는 기꺼이 싸우며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니까. 사람은 한순간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끈질기게 견디며 살아남는 강한 존재이기도 하니까. 결국, 다시 사랑하고 연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니까. 나는 '기억한다는 건, 살아간다는 것'이라고 바꿔 말하고 싶다.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아서 주고픈 마음이 너무 많아서,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그보다 더 괜찮은 말도 없는 것 같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를 보며 나도 그랬다. 이 드라마 그냥 좋았다.




강두와 문수의 투샷만큼이나 좋았던 강두와 할멈의 다정한 모습


개인적인 바람으로 유보라 작가의 대본집이 나왔으면 좋겠다. 극 중 나문희가 연기한 할멈은 그냥 유보라 작가였다.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을 할멈을 빌어서 했다. 그래선지 모든 대사가 적어두고 싶은 명대사였다. 흩어질까 아쉬워 모아둔 할멈의 말들.


"내버려두라. 모르는 게 약인 걸 아는 게 힘이랬다. 야, 그 속이 편한지 니가 어떻게 아니. 우는 소리 크다고 더 아픈 거 아니다."


"강두야. 내 서방 죽은 지 40년이 넘었다. 언젠가는 다 잊고 괜찮아지갔지 기다리고 살다가 깨달은 게 뭔 줄 아니? 그런 날은 안 온다. 억지로 안 되는 건 그냥 두라. 애쓰지 말라. 슬프고 괴로운 건 노상 우리 곁에 있는 거야. 받아들여야지 어카니? 그 대신 더 좋은 사람 만나서 더 재미나게 살면 돼. 너는 그렇게 할 수 있어. 걱정 말라."


"너 사람이 뭐 때문에 제일 많이 죽는지 아니? 암? 사고? 자살? 그거 다 아니다. 사람은 가난해서 죽는 거야. 가난해서 병이 있어도 치료를 못 받고.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험한 일 하다가 사고로 죽고. 가난이 고통스러워 지 목숨 지가 끊고. 가난 때문에 죽는 거야. 그깟 종양? 난 하나도 안 무섭다."


"너무 힘들면 그저 잊어버리고 다 묻어두는 것도 방법이야. 낭중에 어떻게 풀릴지 어케 아니?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안해?"


"야야. 남의 조언 따위 세상에 제일 쓸모없는 거다. 앞으로 네 일은 누구한테도 물어보지 말라. 남의 눈 무서워서 네 맘대로 못하고 괴로워서 지랄하지 말고. 아주 네 멋대로 살아라. 알간?"


할멈이 말했다. 사는 건 후회와 실패의 반복이라고. 나는 빈정거렸다. 그럴 거 살아 뭐하냐고. 할멈은 다시 말했다. 더 멋지게, 후회하고 실패하기 위해서라고. 그러니 쫄지 말라고.



+ 시시콜콜한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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