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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pr 19. 2018

부엌에 숨어본 주부에게

라문숙 <전업주부입니다만>을 읽고

주부가 된 지 삼 년쯤 됐다. 두 살배기 아이 둘을 돌보는 요즘처럼 마음이 변덕스러울 때가 있을까 싶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부이고 아내이고 엄마인 나'가 너무 버겁고 힘들다. 그러다가도 방긋, 아이들 미소 하나에 또 너무 행복해서 죽을 것만 같다. 살림이고 육아고 내버려 두고 도망가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애들 저녁은 뭘 먹이지 냉장고를 뒤적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식구들 먹일 밥걱정에 마음 졸이는 나를 보며 어느새 주부가 다 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썩 좋진 않아서 이상하게 서글픔이 몰려오는 밤이면 나는 책을 읽는다. 한동안 밤마다 읽으며 위로받은 책 한 권, <전업주부입니다만>. 다 읽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읽어보니 식탁에 소파에 가까이 두고 틈틈이 읽어도 좋을 책이었다.


<전업주부입니다만>은 카카오 브런치에서 '단어벌레'로 활동하는 라문숙 작가의 에세이다. '주부이고 아내이고 엄마인 나'와 어떤 수식어도 없는 '나'는 그런대로 사이좋게 지내는 한 쌍이지만 종종 서로를 미워하고 무시하며 싸우고 또 애틋하게 그리워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전업주부의 일상과 가끔은 저곳으로 떠나고 싶은 여자의 꿈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내가 향하는 곳은 부엌이다. 부엌에서 야채를 다듬고 마늘을 으깨는 주부는 평화로워 보인다. 누구라도 애써 그녀에게 괜찮냐고 묻지 않는다. 살림은 계절이 지나고 해가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지만 살림하는 여자의 마음은 매일 다르다. 평온한 날들 사이에 억울하고 막막하고 허전하고 불안한 날들이 양념처럼 끼어든다. 그런 날엔 쉽고 단순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음식을 만든다. 애써서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 가끔은 고요와 평안이 우선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단순 명쾌한 동작의 반복이 나를 진정시키고 식구들은 여전히 내가 궁금하지 않다. 혼자 하는 숨바꼭질이 끝날 무렵이면 생강청이 몇 병 만들어지거나 파이가 완성된다. 완벽한 숨기다.
- 144p '부엌에 숨다'


30년 동안 주부로 살아온 시간 덕분일까. 작가의 글 곳곳에 연륜과 사유가 묻어났다. 뒤죽박죽 엉켜있는 요즘 내 마음이, 깨끗이 빨아 잘 개켜둔 옷들처럼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특히 '부엌에 숨다'를 읽고 크게 공감했다. 부엌에 숨어본 주부는 안다. 억울하고 막막하고 허전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요리를 하는 마음을. 요동치는 마음을 끌어안고 무표정한 얼굴로 부엌에 숨어버리는 것이, 어렵게 속내를 터놓거나 누군가에게 위로받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다.


하루키는 매일 20매의 원고를 아주 담담하게 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네 시간이나 다섯 시간 책상을 마주하는 하루키의 모습에 내 하루를 겹쳐본다. 하루키와 나는 닮았고 또 다르다. 하루키가 하루에 20매씩 담담하게 원고를 쓰는 동안 나 역시 담담하게 아일랜드 식탁을 치우고 밥을 짓는다. 반년이 지난 후 하루키에게는 3600매의 원고 뭉치가 남고 내게는 여전히 커다란 아일랜드 식탁이 놓인 주방이 있다.
- 230p '직업으로서의 주부'


'직업으로서의 주부'를 읽고는 마음이 좀 아팠다. 주부는 사회적 성취와 인정이 없는 일을 매일 반복하는 직업이다. 아침마다 텅 빈 식탁을 돌아보는 마음은 어떨까. 글을 쓰고 싶은 주부라면 때때로 무너지는 마음을 부여잡아야 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 마음에 우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만난 박완서 작가의 말이 위안이 되었다.


"난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살아왔던 시간도 중요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아이를 키우고 식탁에서 글 쓰며 마흔에 작가가 된 여자의 말이었다. 아무것도 쓸 수 없는 날들을 산다 해도 이야기는 남는다. 아마 이 책도 그것들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주부로 살며 미처 말하지 못하고 쓰지 못했던 날들의 이야기를 모아뒀다가 가족들 모두 잠든 새벽에 조금씩 써 내려간 글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첫 장을 열어보았다. 거기서 뒤늦게 '엄마에게'라는 문장을 발견했다. 그 짧은 문장이 전부인 빈 페이지를 나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엄마가 이렇게 나를 키웠듯 엄마가 된 나도 아이들을 키울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내가 선택한 이 삶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무시하고 미워하고 슬퍼하며 보내기엔 너무나 아깝다.


이 삶을 사랑하기 위해 '주부이고 아내이고 엄마인 나'와 어떤 수식어도 없는 '나'가 사이좋게 지낼 방법을 찾을 것이다. 물론 여러 번 절망하고 실패를 거듭하겠지만, 하루에도 수십번 절망하고 실패하는 주부에겐 생각보다 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부엌에 숨어본, 혼잣말을 중얼거려본, 밥걱정에 마음 졸여본, 다른 삶을 꿈꿔본, 그럼에도 아침이면 다시 부엌으로 향할 주부에게. 그리고 엄마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항상 그렇다. 기적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때 생각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다. 빛나는 건 순간이고 순간이 모여 인생이 된다."  - 104p '빛나는 하루'




+ 작가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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