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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Jul 21. 2015

박지연

마녀를 만난 사회초년생

지연은 운이 좋게도 졸업 직전에 취업에 성공했다. 대기업 계열사인 모 광고회사의 마케팅팀이었다. 꿈꾸던 대기업 취업은 아니었지만, 회사명 앞에 대기업의 이니셜이 붙는 것에 지연은 만족했다. 회사에서는 3개월의 인턴과정을 거친 후, 정직원 채용을 결정하겠다고 했다. 3개월이 기회였다.


지연은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내일 오피스룩은 어떻게 입을지 매일 밤 고민했고, 새벽 5시면 일어나 메이크업에 한 시간씩 공을 들였다. 출근길 지하철에선 영어 공부를 하다가 종종 SNS에 출근길 풍경이나 벅찬 다짐 같은 것들을 포스팅했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직장인들과 함께 걸어간다는 소속감, 그리고 도착한 회사 입구에서 사원증을 꺼내 찍는 자부심이 기뻤다.


점심시간이면 지연은 식당 물색부터 자리 선정까지 나서서 고군분투했다. 팀원들의 착석과 동시에 수저와 물 풀세팅을 깔끔하게 해냈다. 지연은 자신이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커피, 카피, 펀칭, 프린트 뭐든지 시켜만 주시면 네네 밝은 표정과 싹싹한 태도로 감사히 임했다. 어떻게 하면 문서 한 장이라도 예쁘게 복사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상사들의 부르심에 한 톤 높은 낭랑한 목소리로 씩씩하게 대답했고, 그런 지연을 모두 좋아했다. 완벽했다. 이 상태라면 3개월은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럴 거라고 지연은 생각했다.


하루는 지연의 직속 사수인 여자 대리가 지연을 따로 불러냈다. 어둡고 빈 사무실에 불도 켜지 않은 채, 그녀는 다리를 꼬고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었다. 지연이 사무실 불을 켜려 하자 그녀가 제지했다. 직감적으로 분위기를 알아챘다. 지연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떨궜다. 대리는 지연을 앞에 세워 두고는 아무 말도 없이 서너 개비 줄담배를 피웠다. 담배가 한 모금씩 타들어 갈 때마다 지연의 속도 타들어 갔다. 대리가 연기를 내뿜을 때마다 지연은 바닥으로 바닥으로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대리님 대리님, 웃으며 따르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차마 눈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야.” 대리가 입을 열었다.


너 그렇게 웃으면서 꼬리 치고 다니면,
오빠들이 예뻐해 줄 것 같지?  


대리는 지연의 얼굴에 대고 후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꼰 다리 한 짝을 까닥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 채로 지연을 내리깔아보더니 입꼬리를 비틀었다. 대리의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 연기 한 올이, 지연을 비웃기라도 하듯 얄밉게 피어올랐다.


지연은 왈칵 눈물이 났다. 연기가 너무 맵고, 뭐가 잘못인지 몰라 억울하고, 혼나는 게 무서웠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지? 그 와중에 머릿속에 재빠른 계산이 오고 갔다. 직속 사수의 평가가 정직원 채용 평가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정답은 자존심보다 정직원이 중요했다. 지연은 치솟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며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대리님. 주의하겠습니다."   


지연은 정직원이 되었다. 지연은 죽은 듯이 납작 엎드려 지냈다. 취업전쟁을 뚫고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데, 이 바닥에서 오래가고 싶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엿들은 여직원들의 뒷담화에서 대리는 마녀로 통했다. 알고 보니 마녀는 그런 식으로 어린 여직원들을 하나하나 사냥하기로 유명했다.


으레 못생기고 찌질한 노처녀의 히스테리일 거라는 짐작과는 달리, 마녀는 젊고 예뻤다. 서른 중반의 마녀는 여리여리한 몸매에 조막만 한 얼굴,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녀였다. 초면에 호감을 사는 인상이었다. 일하는 모습이나 팀원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도도한 커리어우먼의 포스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뿐, 일은 더럽게 못 했고 얼굴로 버틴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마녀는 명품백과 비싼 향수로 치장한 채 출근했고, 종일 인터넷을 뒤적이며 쇼핑에 몰두했다. “난 대머리라도 상관없어. 돈만 많은 남자면 돼.”라고 당당히 말하는 마녀는 ‘초면에 어여쁜 미모와 영악한 애교’를 무기로, 돈 많은 남자를 따져 고르며 다가올 소개팅에 대해 종알거렸다.  


직속 사수인 ‘마녀 모시기’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마녀는 모든 일을 확대 해석하는 과대망상증이 있었고, 종 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감정 기복이 심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올랐다 내렸다 했는데, 기분이 좋은 날에는 메신저로 시도 때도 없이 수다를 걸었고, 기분이 나쁜 날에는 출근 인사부터 냅다 씹었다. 더 기분이 나쁜 날에는 없는 얘기도 지어내 "네가 내 뒷담화를 그렇게나 한다며?" 쪼면서 지연을 쥐 잡듯이 잡았다. 그러고 보니 허언증도 있는 것 같았다.


마녀는 본능적으로 이기적이었다. 애사심이나 동료애 같은 건 없었다. 저보다 센 사람한텐 기었고, 저보다 약한 사람은 밟았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감을 십분 발휘하며 살아남았다. 눈치는 또 굉장히 빨라서 치고 빠지기의 선수였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불리하다 싶으면 모든 잘못을 주위 탓으로 돌렸다. 대부분 그 잘못은 지연이 덮어 썼다. 억울했지만 지연은 그냥 받아들였다. 초반에 제대로 밟힌 지연은 마녀와 싸울 자신이 없었고, 사수와의 관계에서 그나마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웃어주고 비위를 맞춰주며 하루살이처럼 버텼다.  


마녀는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누군가는 꼭 자기 아래로 두어야 만족했다. 대기업의 이니셜만 달았다 뿐이지 이름 모를 회사, 그 조그마한 사무실에서조차 본인이 여왕으로 군림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회사에선 마녀에 대한 뒷말이 드글드글했지만, 누구 하나 대적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연의 이유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일 못 하고 사악해도, 예쁘고 영악한 마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회사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 출근하는 마녀를 보면서 지연은 곱씹었다. 먼저 취업한 언니들이 시발시발하면서 가르치던 사회생활이 바로 이런 건가 보다. 언니들의 시발의 의미를 이제는 알겠다.


지연은 바랐다.

그냥 열심히 일만 하고 싶어요.
이런 거 말고요.


지연은 일 년을 버텼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사내 종무식이 2차 3차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은 맘 놓고 취했다. 모두가 취한 최후의 술자리에서 지연은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마녀가 사장의 손을 꼬옥 잡고 곁에 앉아있었다. 술에 취한 모 부장이 꼬인 발음으로 물었다. “아니, 지금 두 분 뭐하시는 거예요?” 마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사장님이 춥다고 하셔서요.” 취할 대로 취한 사람들은 와하하 웃으며 그러시구나, 마셔마셔, 하고 또 마셨다. 그 이상한 광경이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시선을 옮기자 놀랍게도 사장이 마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마녀는 눈을 흘기며 키득거렸다. 그 순간 지연은 마녀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눈이 풀린 마녀는 요염한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지연은 뚫어져라 그 얼굴을 쳐다봤다. 눈물겨웠다. 과장된 웃음으로 어리고 예뻐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신이 사랑받고 인정받는다고 의기양양 착각하는 그 얼굴을 보면서 지연은 마녀의 말을 떠올렸다.  


“너 그렇게 웃으면서 꼬리 치고 다니면, 오빠들이 예뻐해 줄 것 같지?”  


세상에, 누가 너 따위를 예뻐해 줄까. 지연은 마녀가 불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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