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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Jul 14. 2015

이수연

인스턴트 러브를 먹을까 말까

설핏 잠이 들었다가 일어나니 5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수연은 침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노래를 들었다. 며칠째 같은 꿈을 꾸었는데, 일어나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리가 무거웠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차라리 잠이라도 푹 잤으면 좋겠는데. 창밖으로 희부연 아침이 안개처럼 깔리고 있었다. 수연은 눈을 감고 헤드폰으로 귀를 막았다.


수연은 며칠 전 이별통보를 받았다. 3개월을 사귄 남자에게 알고 보니 다른 여자가 있었다. 심지어 몇 년이나 사귄 오랜 여자친구였다. 수연은 의도치 않게 세컨드가 되어 버렸다. 남자를 만나기 위해 수연은 원래 남자친구를 정리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나쁜 년도 되어 버렸다. 운명 같은 남자에게 반해 3개월을 뭣도 모르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다 거짓말이었다. 근데 더 기가 막힌 건 이별조차 그에게  통보당했다는 거였다. 정작 수연은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운명이라고 생각한 남자를 사랑했을 뿐이었다.  


수연이 반한 남자는 착한 남자였다. 어리바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에 바보 같을 정도로 착했다. 하는 연애 족족 나쁜 남자들한테 데었던 터라 수연은 어리숙한 그가 좋았다.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수줍은 듯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는 남자였다. 덥수룩한 그의 머리가 예뻤고, 구부정한 그의 등을 안아주고 싶었다. 영화, 책, 노래, 그 밖에도 남자는 수연의 취향과 백 퍼센트 일치했다. 아무  말없이 마주 보고만 있어도 서로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둘만의 그런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수연은 그가 자신의 소울메이트라고 확신했다. 안경 속 그의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생각했다. ‘아! 이 남자를 내가 보듬어주고 싶어’. 이런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아니었다. 남자는 이별을 통보하며 덧붙였다. “넌 너무 진지한 거 같아. 난 그런 건  아니었어.”라고 순진한 눈을 깜빡이며.        


뭘 그렇게 진지했냐고. 굳이 변명을 하자면 수연은 가볍고 싶지 않았다. 남자와 마주친 첫 장면부터 특별하고 싶었다. 우리는 운명이야. 죽을 동 살동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이고 싶었다. 정말로 수연에겐 그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 애틋하고 특별했다. 우리 사랑에도 장르가 있다면, 멜로나 드라마가 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진지했던 수연의 사랑은 오히려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세컨드이자 나쁜 년인 수연은 혼자 괜히 오버하다 버려졌다. 수연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부끄러울 정도로 웃겼다. 그런 자신이 역겨워서, 수연은 울고 싶었다.


빗방울이 굵어졌다. 수연은 커피를 들고  다시 쪼그려 앉았다. 눈을 깜빡였다. 낯설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못생겼다. 깨끗이 정돈된 책상까지도 보고 있자니 짜증이 났다. 커피는 정말 더럽게 맛없다. 직접 맛보기 전에는 모르는 건가 보다. 처음엔 달콤했는데, 결국 이렇게 쓰다. 그렇게 사랑한다고 죽고 못 살았는데, ‘너는 나의 소울메이트’ 속삭이며 온갖 낭만은 다 꿈꿨는데. 남은 건 휴짓조각 같은 자존심과 허무함뿐이니. 씁쓸했다. 너무 쓰다. 뭔가 달콤한 게 없나 살펴봤지만, 달콤한 건 연애뿐이다. 하지만 수연은 아무리 달달하게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빈속이었다.   


배고플 때 한 끼, 3분이면 오케이.
맛있게 먹고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만.

맛있고 간편한 인스턴트 러브를
나만 빼고 다 골라 먹었나.


수연은 홀짝, 더럽게 쓴 커피를 마셨다.

하필이면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또 하필이면 혼자였다. 비가 참 무겁게도 내린다고. 수연은 외롭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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