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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ug 03. 2015

김나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삑, 삑, 삑, 삐익.

체육쌤이 요란하게 호루라기를 불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너무 커서 음악 소리가 안 들릴 지경이었지만 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쌤은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처럼 우렁차게 호루라기 구령을 붙였다. 그나마 박자를 맞추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운동회가 뭐라고. 다가올 가을 운동회 준비에 우리는 땡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패티케이크 폴카를 추고 있었다. 패티케이크 폴카. 무슨 케이크 종류인가보다 싶은, 이름도 생소한 미국의 포크댄스였다.


처음에 남자애들이랑 손을 잡고 포크댄스를 추라는 말에 여자애들은 일제히 야유를 쏟다. 꼬맹이들이나 귀염 떨며 추는 포크댄스를 5학년 때도 추게 될  몰랐다. 말이 돼? 우린 고학년이란 말이다. 여기저기 쏟아지는 야유 속에서 나는 백규를 흘깃 훔쳐봤다. 그래도 강강술래 하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 그리고 뭐, 나는 백규의 손도 잡아볼 수가 있겠지.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온몸으로 땀을 흘 있는, 커다란 하마 앞에 서 있었다. 시큼한 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흡, 숨을 들이마신 채 랑 팔짱을 꼈다. 순식간에 의 오른팔에 붙들린 내 몸이 휘청거렸다. 엄마야. 이건 팔짱이라기보다 소시지 같은 녀석의 팔에 내 팔이 끼여버린 모양새였다. 생각보다 유연 몸짓으 가 빙글 돌았다. 나는 튜브에 낀 어린애처럼 바둥거리며 끌려갔다. 그렇게 하마와 빙글빙글 돌면서 나는 재빨리 오른쪽을 쳐다봤다.


하나, 둘, 셋, 넷.

정확히 네 번째 줄에 머리통 하나가 쑤욱 솟아있었다. 백규였다.

그래, 네 번만 더 추면 되는 거지?


빙글, 이번엔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작은 안경테가 앞에 서 다. 녀석이 손을 내민다. 나는 따분하단 표정으로 녀석의 손가락 끄트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대충 내 멋대로 스텝을 밟았다. 손뼉을 칠 때는 일부러 높은 곳으로 팔을 번쩍 올렸다. 안경테가 내 손뼉을 마주치려고 까치발을 들었다. 녀석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나오는  겨우 참았다. 내키진 않았지만 안경테와도 팔짱을 꼈다. 제자리에서 그르 돌았. 자, 이제 세 번만 더 추면 되는 거다. 나는 그때까지 노래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빙글, 그리고 또 빙글. 두 번 더 파트너가 바뀌고 드디어 백규가 내 앞에 섰다. 내 키보다 작은 남자애들이 수두룩인데, 백규는 나보다도 키가 훌쩍 컸다. 백규의 윤기 나는 참머리가 햇빛에 반사되어 찰랑거렸다. 백규는 땀 냄새나 풍기는 시꺼먼 남자애들과는 달랐다. 흰색 폴로 티를 입은 는 귀티가 났다. 귀티나는 애들은 햇볕에도 잘 타지 않나 보다. 뽀얀 피부에 얼굴도 오똑오똑 잘생겼다. 덥다고 투덜대는 얼마저 잘생겼다.


정말이지 내가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참고 기다렸는지 말해주고 싶었. 하지 나는 백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저 그런 척 심드렁한 얼굴로 백규의 손등만 빤히 쳐다봤다. 드디어 백규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아니, 백규는 소리쳤다.


아씨! 손에 땀이 왜 이렇게 많아?


백규가 내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체육쌤의 호루라기 소리가 멈췄다. 갑자기 시선 집중. 버림받은 내 손이 오갈 데 없이 덜렁거렸다. 반 애들이 웅성거렸다. 그 와중에 폴카 노래만 왕왕,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등줄기부터 싸늘한 기운이 퍼지더니, 난 아까 안경잡이처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백규는 위풍당당 소리쳤다.


“선생님, 얘 손에 땀 장난 아녜요. 저 짝 바꿀래요.”


뭐야, 나 지금 창피당하고 있는 거지? 알긴 알겠는데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내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땀이 흥건한 손바닥이 어룽어룽 번져 보였다. 운동장 바닥에 눈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백규는 제 손을 자락에 슥슥 닦고 있었다. 나쁜 놈.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니들 왜 그래? 체육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웅성거리며 다가오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나는 운동장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흙 한 줌을 쥐었다. 어떡해. 얘 우나 봐. 거림 속에서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백규의 얼굴에 흙을 내뿌렸다.


나쁜 새끼야!


그대로 뒤돌아서서 나는 걸었다. 벙찐 아이들의 시선이 등에 내리꽂혔다.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절대로 안 돌아볼 테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나는 재빨리 눈물을 훔쳤다. 손바닥을 펼쳐봤다. 흙을 얼마나 게 쥐었는, 손바닥에 모래알이 콕콕 박혀 있었다.


씩씩거리며 걸어가는 내 등 뒤로 쨍쨍, 해가 내리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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