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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Mar 01. 2019

나는 오늘을 위해 그동안의 생을 견뎌온 것 같아

김버금 <당신의 사전>

세상을 보는 눈이 유독 맑은 사람이 있다. 티 없는 맑음이 아니라, 탁하고 어두운 시간을 오래 견뎌내어 마음의 불순물들이 바닥에 가라앉은 후의 맑음, 그런 앓고 난 후의 맑은 눈을 가진 사람. 나는 이 책을 쓴 작가가 그런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브런치에서 '할머니의 유가사탕'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김버금 작가의 글이었다. 글 한 편을 읽고 여운이 길어서 다른 글들도 찾아 읽었다. 급기야 작가의 텀블벅 후원에 참여했고, 그녀가 직접 만든 독립출판물을 받아 보았다. 마음의 이름들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당신의 사전>. 에세이지만, 시집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책 속의 이야기들에 계속 마음이 쓰였다.


나는 어째서 타인의 상처가 잘 보이는 걸까. 작고 여리고 잘 보이지 않는, 죽어가는 것들이 신경 쓰일까. 나는 왜 그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할까. 그런 사람이라면, 김버금 작가의 글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사실 나도 그런 사람이라서 그녀의 글이 좋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글만 읽었을 뿐인데, 우리는 비슷한 결을 지니고 있다고. 어딘가 이어진 기분이 들었다. 이 작가의 글은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아야 한다고, 반드시 그러리라 생각한다.


남모르다. 낯설다. 불안하다. 사랑하다. 소중하다. 애틋하다. 이상하다. 자유롭다. 저리다. 철렁하다. 홀가분하다. -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좋았던 마음과 글들이었다. 언제 나는 이 마음들을 느꼈었나 돌아보다가 자꾸만 울컥했다. 여기까지 흘러온 나의 삶이 고마워서. 겪고 견디고 기억해준 나의 마음이 고마워서.


김버금 <당신의 사전>


저녁밥을 짓고 둥글게 모여 앉아 밥그릇을 긁는 훈훈한 공기보다 어스름한 밤의 공기를 남몰래 견디는 시간들처럼. 시시콜콜한, 너무나 시시콜콜한 비밀은 서늘할 만큼 쓸쓸하다. 키 대신 마음만 훌쩍, 자랐던 밤이었다.

- '남모르다' 중에서


어린 딸을 어르고 달래던 앳된 얼굴을 나는 기억해. 주름 없이 통통한 분홍빛 손가락, 그 열 손가락에 깃든 다정한 손길을 기억해. 주근깨 박힌 얼굴로 허리를 젖혀가며 웃던, 내복 바지를 입은 어린 나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던 따뜻한 봄날을 기억해. 함께 주운 가을 낙엽을 코팅해 앨범에 넣던 노란 저녁을 기억해. 내가 처음으로 끓였던 설익은 라면을 맛있게 먹어주던 느린 일요일을 기억해. 떨어져 다친 나를 등에 업고 시장을 내달리던 겁에 질린 얼굴을 기억해. 아빠와 다툰 날, 수도꼭지를 틀어놓고서 몰래 흘려보내던 외로운 등허리를 기억해. 스물일곱의, 꼭 나와 같은, 그래서 어른이라는 이름이 낯설었을, 나와 닮은 얼굴의 너를 나는 기억해.

- '소중하다' 중에서


웃음과 울음은 꼭 자음 하나 만큼의 차이가 난다. 그 작은 차이의 틈 사이에서 울고 웃는 동안, 사람의 일생이 지나간다.

- '이상하다' 중에서


두 손으로 비둘기를 들어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서 조금 떨어진 풀숲에다 조심히 내려다 주었다. 난생처음 만져본 비둘기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풀 위에 가방을 놓고 비둘기의 옆에 잠시 앉았다. 비둘기의 숨이 느리게 잦아들고 있었다. ...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다짐했다. 그래. 인생이 설명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라면 설명할 수 없는 내 마음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아도 좋겠다. 그러니 더 이상 나를 속이지 말자. 내가 오늘 한 일 중 좋은 일은 비둘기의 마지막을 지켜봐 준 일. 그리고 비로소,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일이다.

- '자유롭다' 중에서


"나는 오늘을 위해 그동안의 생을 견뎌온 것 같아."

- <당신의 사전>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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