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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Mar 07. 2019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사랑하는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되었다.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과 <기형도 전집>은 20대 시절 나에게 부낭 같은 책이었다. 내 생에 가장 탁하고 혼란했던 시절, 나는 그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걸었다. 그러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픔과 슬픔과 우울에 솔직한 시인이 좋았다. 시인의 시와 산문들은 나를 사로잡았다.


단 한 권의 시집으로 남은 시인. 그의 시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를 고르기란 쉽지 않다. 다만 읽으면서 '나도 내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글 쓰며 살고 싶다.' 생각했던 시가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노트에 옮겨 적고 자주 읽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내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아프고 슬프고 우울했던 지난날을. 쓰면서 힘주어 되뇌었다. 어떤 상처도 나를 바꾸지 못할 거라고. 이것이 수년 전 세상을 떠난 시인이 나에게 주고 간 것이었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 기형도.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suri.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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