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도처에 널려 있어요

최혜진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by 고수리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와 책을 소개하는 일은 어렵다. 좋아하는 마음이 앞서서 곤란하다. 잘 소개하고 싶은데, 차분히 적어보고 싶은데 아무리 해도 성에 차지 않아 의기소침해지고. 그러다 결국 하고픈 말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 좋아"라고 대답하는 거. 얼마나 바보 같은지. 그런데 그걸 지금 내가 하고 있다.


나는 최혜진 작가의 오랜 팬이다. 그녀의 책들을 초판본으로 모두 소장하고 행여나 구겨질까 조심조심 아껴 읽는다. 다섯 권의 책을 그렇게 읽다 보니 우리는 이미 책 속에서 여러 번 만난 깊은 사이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내 친구 같고 언니 같다. 고민이 생기면 책을 열고 그녀에게 묻는다. 그럼 그녀는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이런 그림은 이런 책은 어떤지. 이런 창작자의 태도는 어떤지.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1월에 그녀의 신간이 나왔다.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표지부터 아름다운 이 책을 나는 겨울 동안 어디든 들고 다니며 아껴 읽었다. 이 책은 더 각별했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한 사람이 책 속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빌헬름 하메르스회이. 게다가 최혜진 작가는 빌헬름 하메르스회이의 그림을 발견한 계기로 북유럽 미술관 여행을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3년 동안 총 2만 4870킬로미터의 여정이었다.


혹시나 짐작할 수 있는지.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좋아하는 화가가 같다면, 그의 그림에서 우리가 비슷한 것들을 느끼고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반갑고 기쁠지. 황홀할지 말이다. 책을 열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그녀처럼, 빌헬름 하메르스회이는 나에게도 아주 소중한 화가이다. 나만 혼자서 알고 싶었던 화가. 이십 대 시절이었다. 우연히 빌헬름 하메르스회이 그림을 마주하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깊고 고요한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 멀고도 가까운 어떤 위로. 시공간을 뛰어넘어 과거의 화가가 울고 있는 나에게 조용히 하얀 손수건을 건네주는 느낌이랄까.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아름다움과 그 너머의 위로를 그때처럼 사무치게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에게 매료되었고, 심지어는 그의 생활 방식도 삶도 철학도 닮고 싶었다. 이후로 빌헬름 하메르스회이는 나에게 소중한 화가가 되었다. 이런 반짝이는 화가, 그리고 그와 닮은 북유럽 화가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가치 있다.


빌헬름 하메르스회이의 그림들


그들의 그림을 통해 우리는 달착지근한 환상에 젖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제대로 보는 법을 배운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그렇게 해서 우리 또한 그런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_ 츠베탕 토도로프, <일상 예찬> 부분 - 39p


북유럽 화가들이 그린, 인물이 보여주는 독특한 몰입의 에너지 역시 매혹적이었다. 둥그런 스탠드 불빛 아래서 책을 읽고, 비스듬히 볕이 드는 창가에서 바느질을 하고, 아이 머리칼을 빗겨주거나 난로를 바라보는 등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을 할 뿐인데도 북유럽 화가들이 그려낸 인물들은 자신만의 자장을 가진 듯 보인다.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본 사람만이 뿜어낼 수 있는 끌어당김의 기운. - 47p


빌헬름 하메르스회이 뿐만 아니라 잘 몰랐던 북유럽 화가들과 그림들을 만났다. 보통 사람의 삶, 사소한 일상, 고요한 풍경, 무언가에 몰입한 사람을 그린 그림들은 아름다웠다. 작고 조용하고 평범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꾸려가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름다움은 멀리 있지 않다고. 도처에 널려 있다고 속삭인다.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찾아내 그린 북유럽 화가들의 시선이 좋았다. 비단 그림뿐일까. 글을 쓰는 나도 닮고 싶은 시선이었다.


특히 시대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작가들, 그리고 크리스티안 크로그라는 화가를 알게 되어 좋았다. 소외된 사람들을 동일시했던 마치 다큐멘터리 감독 같은 크리스티안로그의 철학과 그림은 한동안 나에게 머물 것 같다.


(좌) 마리 크뢰위에르 그림 (우) 크리스티안 크로그 그림


고흐로 시작해 하메르스회이로 이어지고 뭉크로 끝나는 최혜진 작가의 책을 읽으며 내가 왜 그녀를, 그녀의 글을 좋아하는지 확실히 알았다. 고통스러웠던 어느 한 시절, 우리가 같은 예술가를 찾고 위로와 영감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부터 글쓰기를 지속할 힘, 살아갈 힘을 얻었다는 것.


우리 모두의 마음엔 그런 지점이 있다. 근처만 가면 당황하고, 넘어지고, 수습 안 되는 고약한 반응이 튀어나오는 곳. 매번 같은 자리에서 자꾸 넘어지면서도 간단히 넘기거나 잊을 수 없어서 생각이 그 주위를 뱅뱅 맴도는, 엄마이거나, 차별이거나, 거절이거나, 못난 외모거나, 당차게 차인 실연 경험이거나, 건강하지 않은 몸이거나, 아무튼 통증을 불러일으키는 기억들.

나는 뭉크가 통증을 불러일으키는 기억을 응시하고 이해하고 정의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믿는다. 표현함으로써 자유로워지기 위해, 스스로를 마구잡이로 벌어진 불행한 사건의 희생양으로 여기지 않기 위해, '당하는' 피해자 자리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의 자리로 이동하기 위해 내면의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같은 상처를 반복해 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원인과 양상을 통제할 수 없는 아픔에 대처하는 가장 멋진 자세라고 생각한다. - 264p


최혜진 작가가 다녀온 뭉크의 무덤. 책에 실린 어떠한 그림들보다 뭉클했다.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을 읽으며 나는 줄곧 어떤 장면을 상상했다. 작가와 내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죽은 예술가들의 그림을 사이에 두고 거울의 맞은편에 마주 선 사람들처럼 그림을, 그림 속 사람들을, 그리고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 정작 서로는 알아채지 못하는 고요하고 격렬한 순간을.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자주 그런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작가와 화가와 독자는 이렇게 만나기도 한다. 시간을 넘어 그 안에 떠다니던 수많은 말없는 말들을 우리는 주고받았다. 나에게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은 그랬다.




@suri.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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