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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May 17. 2019

늘 이만큼만 써라

20년 차 선배작가의 조언

<인간극장>에서 짝꿍으로 일했던 메인작가님을 만나 뵈었다. 선배는 내가 동경하는 작가, 나에게 커다란 사람이었다. 당시에 나는 20년 차 대선배가 방송 만드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그녀가 쓴 원고를 가장 먼저 읽는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찼었다.


그런데 문제는 선배도 내가 쓴 글을 가장 먼저 읽는다는 것이었다. 취재작가인 내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글은 보도자료였는데, 두 페이지에 불과한 글쓰기가 나에겐 엄청난 부담이었다. 글을 못 쓴다고 혼나는 것도 아니었다. 선배는 오히려 내 옆에 앉아 글 쓰는 방법과 방향들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다고 격려하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1년 차 작가에겐 당연한 일. 러나 그때 나는 글 못 쓰는 내가 부끄러웠다. 마음속에는 '잘 쓰고 싶다'와 '칭찬받고 싶다'라는 욕심이 빵빵하게 차올랐고. 결국, 나는 너무너무 큰 마음 때문에 주눅 들고 두려워서 한 줄도 쓰지 못하다가 마감 시간에 쫓겨 별로인 글들을 썼다. 보내고 나서는 늘 후회했다.


그러다 한 번은 출연자에게 홀딱 반한 일이 있었다. 비금도에서 소금밭을 일구는 부부였다. '나는 하늘에서 소금하라고 내려줬어.'라며 소박한 인생철학으로 소금밭을 일구는 남편과, '아침 동산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남은 삶은 주위에 희망을 주며 살고 싶어.'라며 활짝 웃는 아내. 나는 그들에게 푹 빠져버렸다.


돌아보면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가장 즐겁게 만들었던 방송이었다. 보도자료를 쓰게 되었을 때, 적어도 그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 그분들이 만족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러브레터를 쓰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 1차 보도자료를 선배에게 전송했다. 답변을 받았다.


"늘 이만큼만 써라. 너의 글에 주인공에 대한 애정이 살아서 팔딱이니 그게 참 좋더구나. 글이란 게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거 같아도 에너지가 있거든."


선배에게 처음으로 받은 칭찬이었다. 이 메일을 받고서 나는 몰래 울었다. 결국은 진심이었구나. 내 욕심일랑 탈탈 털어내고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쓰면 되는 거구나 깨달았다. 이 칭찬의 말은 오랫동안 나에게 나침반이 되었다. 늘 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바늘처럼 내가 작가로서 써야 할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당시에 선배는 두 살배기 아이를 키우며 둘째를 임신하고 만삭의 몸으로 일했다. 그때는 몰랐다. 선배가 매일 사무실에 나와 일하고, 밤새워 원고를 쓰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6년이 지났다. 내가 쓴 두 번째 책을 들고 선배를 만나러 갔다. 그 사이 나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분야는 조금 달라졌지만 여전히 글을 쓰고 있고.


선배를 마주하자 나는 다시 철부지 후배로 돌아갔다. 엄마가 되어보니 선배가 당시에 얼마나 힘들고 절실하게 일했는지 알 것 같다고. 나는 아직 글 쓰는 '엄마'라는 타이틀이 조금 버겁다고. 내 글의 정체성이 혼란스럽다고. 쓰는 글마다 너무 진지하고 절실하고 나이 든 것 같아서, 사람들이 무거워할까 봐 걱정된다고. 작가인 나도 엄마인 나도. 잘하고 있는 건지, 잘할 수 있을지 두렵다고. 걱정들을 마구 쏟아냈다.


"작가에게 엄마가 되는 경험은 엄청난 축복이야. 너는 이제 이전과 같은 글은 쓸 수 없어. 엄마가 되면서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달라졌거든. 걱정하지 마. 네가 쓰는 글은 더 좋아질 거야. 풍성해질 거야. 따뜻해질 거야. 그러니 지금처럼만 쓰렴."


늘 이만큼만 쓰라고 격려하던 그녀가 지금처럼만 쓰라고 말한다. 나는 또 선배의 말에 힘을 얻는다. 내가 동경하던 글을 쓰던 그녀가, 내가 고민하는 길을 앞서 걷던 그녀가, 이렇게 말해주어 는 또 안심하며 쓸 수 있을 것 같다.



돌아오는 길. 선배가 긴 문자를 보냈다.


'엄마 작가 후배는 말 안 해도 짠해. 더군다나 두 아이 키우며 책 쓰는 일을 혼자 다 해냈다니, 나는 네가 너무 대견하다. 뭐든 할 수 있을 거야 그 열정이면.'

'엄마가 되어 선배님을 만나니 더 좋네요. 너무나 충만한 만남이었어요.'

'나도 좋았어.'


선배는 여전히 나에게 커다란 사람. 그리고 나를 이끄는 사람이다. 나에게 이런 스승이 있어 감사했다.   








+) 2013년 5월 3일에 받은 메시지.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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