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의 고백

결국, 사랑한다는 마음

by 고수리

거리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로 아기를 껴안고 혼잣말을 속삭이며 걸어가는 엄마를 보았습니다. 조그만 아이는 너무나 예뻤지만 마음 한편이 저릿했어요. 함부로 어떤 말을 건넬 수는 없지만, 그저 어떤 말이라도 건네주고 싶은 마음. 가만히 아기 엄마의 등이라도 쓸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거든요. 예쁜 아기보다도 엄마에게 더욱 마음이 쓰이는 건, 제가 그런 엄마의 시간을 겪어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얼마 전에는 20년 지기 친구, 기원이네 집에 찾아갔어요. 신림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다시 택시를 타고 봉천동엘 갔습니다. 경사가 가파른 언덕에 크고 작은 주택들이 빼곡했지요. 거기서 친구의 집을 찾았어요. 서울 어딘가, 낯선 언덕을 오르며 친구의 집을 찾는 기분은 참 이상했습니다. 뾰족하고 빼곡한 집들 어딘가에 내 친구가 살고 있다는 것. 숨바꼭질하는 기분이랄까요. 거의 일 년 만에 보는 친구가 어떤 얼굴일지 궁금했습니다.


기원이는 조그만 아가를 안고 있었습니다. 아기는 태어난 지 86일이 되었고, 기원이도 엄마가 된 지 86일이 되었습니다. 이게 얼마만이야! 저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지는 기원이를 보고는 활짝 웃어주었습니다.


세상에. 아기는 이토록 작고 예쁘고 연약한 존재였구나. 아이를 둘이나 키우는 엄마지만 새삼 감탄했습니다. 아기의 새까만 눈동자가 너무나 맑아서 빤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기원이를 똑 닮아 코가 오똑하고 입술이 빙그레 웃는 듯 예뻤습니다. “기원아, 아이한테서 네가 보여. 정말 예쁘다.” 빨간 모자를 쓰고 딸꾹질하는 아기를 안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아기 안는 방법 다 잊어버린 거 있죠. 목도 잘 가누지 못하는 아기를 엉거주춤 안고서 둥둥 어르는데, 갑자기 우리 아이들이 아기였을 때, 번갈아 껴안고 서성이던 밤이 떠올라 찡해지고 말았습니다. 친구가 걱정되었어요. 며칠 전 기원이와의 통화가 마음 쓰여 일부러 찾아온 터였거든요. 기원이는 많이 지쳐있었습니다.


“요즘 이상해. 애기는 예쁜데, 자꾸 툭하면 눈물이 나.”

“힘들지. 애기 엄마 되면 눈물이 많아져. 나도 이맘땐 맨날 울었어.”


모두가 다 지나가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지만, 아기가 가장 예쁜 시기라고 이야기하지만, 엄마였던 사람들은 알고 있는 그 길고 긴 시간. 그 시간과 돌봄의 무게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또 얼마나 어려웠는지.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아기를 재우고 우리는 인도 커리를 시켜 먹었습니다. 팔락 파니르와 프라운 마크니라는 이름도 낯선 커리들에다가 엄청나게 커다란 난을 찢어서 찍어 먹었습니다.


"야, 이렇게 친구랑 마주 보고 수다 떨면서 밥 먹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기원아. 이름도 이상한 커리 먹으니까. 우리 어디 여행 온 것 같다"


그러자 기원이가 창문에 달아둔 꼬마전구를 켜고, 재즈까지 틀어주었습니다. 집안에 아기 용품들이 가득했지만, 불빛이 반짝이고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흐르니까 정말로 낯선 외국에 어느 집으로 놀러 온 기분이 들었어요.


"네가 와서 너무 좋아."


기원이가 말했습니다. 아주 잠시였지만, 우리는 떠나온 사람들처럼 나른하게 웃고 떠들며 커리를 먹었습니다. 아주 맛있는 식사였어요. 고맙게도 아기는 오래 자주었습니다.


아마,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분들 중에서도 서서 밥 먹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혼자 밥 먹거나 설거지를 할 때, 사람 목소리가 그리워서 항상 라디오를 틀어두곤 했거든요. 혼자 쓸쓸히 대충 밥 먹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걱정이 됩니다. 서서 밥 먹는 제가 속상해서 호되게 혼낸 엄마의 마음도, 친구의 전화 목소리가 걱정되어 찾아간 저의 마음도, 어쩌면 다 똑같은 마음 아닐까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밥을 밥답게 잘 챙겨 먹었으면 하는 마음.


겨우 한 끼 만들어 먹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지.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고 같이 나눠 먹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 따뜻한 집밥 한 끼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보살피는 사랑이더라. 엄마. 나는 비로소 나 자신도, 다른 사람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것 같아.
- 고수리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바다처럼 짰다>


이 책의 마지막에 저는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를 적었어요. 엄마와 바다와 음식과 추억들을 쓰면서, 할머니로부터 이어진 긴긴 이야기를 채워가면서, 제가 배운 것은 결국, 사랑이었습니다.


“밥 잘 챙겨 먹으라.”


할머니와 엄마의 말이 사무치게 이해되는, 엄마가 되어서야 깨닫습니다.


밥 잘 챙겨 먹으라는 말이야말로

사랑한다는 엄마들의 고백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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