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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22. 2021

아버지의 저무는 마음

우리 미워하지 말고 웃으면서 지내자

해를 따라 생활하는 사람에게 늦가을은 쓸쓸한 계절이다. 해 뜰 때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면 해질 때쯤에는 하루가 다 가버린 것 같은 피로와 쓸쓸함이 밀려오는데, 가을이 깊어질수록 해는 빨리 저물고 마음에도 바람이 불었다. 어릴 적 긴긴 밤은 이불 같아서 잠들지 않고도 품에 안고 마음껏 누릴 수 있었는데 살아갈수록 지켜야 할 생활과 돌봐야 할 이들이 품에 넘쳐 이제는 밤이 좀 스산하다.


이맘때 느끼는 밤의 어둠은 새벽의 어둠과는 다르다. 이내 밝아질 것을 알고 있는 마음과, 오래 어두울 것을 알아버린 마음은 분명히 다른 것이니까. 저무는 계절에 저무는 해를 따라 어두워지는 이 마음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름이라도 붙여 줘야 익숙해질 것 같아서 ‘저무는 마음’이라 혼자 불러볼 뿐이었다.


어느 저녁, 차를 타고 가던 시아버지가 지금이 몇 시인지 물었다. “곧 일곱 시예요”라고 대답하자 “해가 많이 짧아졌구나. 깜깜할 때 다닌 적이 별로 없으니까 깜깜한 게 낯설다”며 헛헛하게 웃으셨다. 아버지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저녁 여덟 시면 주무셨다. 휴일도 없이 이른 아침부터 몸을 움직여 일하고 돌아와 일찍 잠드는 단조로운 생활을 오래 하셨다. 아직 깜깜한 새벽에 밖을 나서는 아버지에게도 밤의 어둠은 다른 것이었다. 지켜야 할 생활이 해의 시간에 길들여진 사람에게 밤은, 더욱 낯설고 짙은 것일까. 문득 아버지가 느끼는 마음이 내가 부르던 저무는 마음이라는 걸 알아챘다.


나는 ‘아버지’라는 말이 평생 낯설었다. 시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의 사랑을 처음 받아 보았다. 연애 시절부터 내 손을 꽈악 잡고 걸으시던 분. 신혼집 페인트칠과 잡기 수리, 고장 난 보일러도 나서서 뚝딱 고쳐 주시던 분. “너는 가만히 있어라” 하며 과일 깎아주고 설거지 도맡아 하시던 분. 사랑한다, 자랑스럽다 다정한 말들을 아무 때나 건네시는 분. “아버지” 불러볼 때마다 여전히 쑥스럽지만 그래도 내가 뒤늦게 아버지 복이 있었노라 행복했다.


어둑한 차창에 비친 아버지 얼굴을 살피며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했다. 내내 생각하다 보니 저물어 가는 아버지의 생을 헤아리고 말았다. “살아봤자 얼마나 오래 살겠니. 우리 미워하지 말고 웃으면서 지내자.” 평소 하시던 말이 사무치게 이해되어서 뭉클. 세월의 나이테가 굵어진 아버지에게 이제 저녁은 쉽게 오고 빠르게 저문다.


뭉클.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시력이 점점 흐려지는 사람에게 뭉클한 날이 자주 온다’ 던 어느 시의 문장이 찬바람처럼 스몄다. 그저 아버지가 춥지 않도록, 아버지의 저무는 마음을 곁에서 오래도록 지켜보던, 그런 저녁이 있었다.



오늘자 동아일보 [관계의 재발견] 칼럼을 썼습니다. 마지막에 인용한 시는 이사라 시집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에 수록된 '뭉클'이라는 시입니다. 추워질수록 곁에 있는 사람의 뭉클을 알아채고 지켜봐 주는 날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뭉클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시력이 점점 흐려지는

사람에게

뭉클한 날이 자주 온다


희로애락

가슴 버린 지 오래인

사람에게

뭉클한 날이 자주 온다


사랑이 폭우에 젖어

불어터지게 살아온

네가

나에게 오기까지

힘들지 않은 날이 있었을까


눈물이 가슴보다

먼저 북받친 날이 얼마나

많았을까


네 뒷모습을 보면서

왜 뭉클은

아니다 아니다 하여도

끝내

가슴속이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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