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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ug 19. 2015

수요일의 길치

<멀쩡한 이유정> 세상의 모든 멀쩡한 길치들에게

부끄럽고도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좌회전과 우회전이 헷갈린다. 두 갈래 길을 앞에 두고서 구구단을 외우듯 속으로 중얼거린다. 좌회전, 왼 좌, 왼쪽 회전. 우회전, 오른 우, 오른쪽 회전. 그렇다. 나는 아주 심각한 길치이다.


맨날 오가는 골목길도 걷다 보면 새롭다. 자전거, 버스, 지하철. 탈 것들의 종류를 따지지도 않고 다 헤맨다. 지도를 들여다봐도 동서남북 길이 뻗은 방향부터 찾질 못한다.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고 해도 그냥 감으로 이쪽저쪽 길을 선택해서 걷는 부주의한 보행자다. 세상이 좋아져서 스마트폰으로 길 안내를 받아보지만, 용케 귀신같이 틀린 길만 골라 찾아간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재주라고 싶을 정도로 나는 그야말로 완벽한 길치다.


어제는 자주 놀러 갔던 카페를 찾지 못해 뙤약볕 아래에서 한 시간을 헤매다가 결국 다른 카페에 갔고, 엊그제는 버스를 잘못 타서 옆옆 동네까지 갔다. 버스를 두 번 더 갈아타고도 이 지역 한 바퀴를 다 돌았다. 버스에서 내린 후에도 한참을 걷고 또 헤매서야 집에 도착했다.


지금보단 총명했던 이십 대 시절에도 나는 길치였다. 신입사원 때는 제본 맡긴 문서를 찾으러 갔다가 회사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한참을 헤매다가 내가 땡땡이라도 친 줄 알았던 상사의 호출로 결국 택시를 타고 회사에 돌아갔다. 알고 보니 회사는 바로 코앞에 있었다.


이사한 지 며칠 안 되었을 땐, 우리 집을 찾지 못한 적도 있었다. 하필 그날은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쳤고, 나는 우산도 없이 세찬 비바람을 쫄딱 맞았다. 여기만 돌면, 여기만 쭈욱 걸어가면, 여기가 바로! 우리 집이 짜잔 하고 나타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딜 봐도 다 똑같이 생긴 아파트 단지들만 서 있을 뿐, 우리 집이 나를 두고 통째로 이사를 간 것만 같았다. 결국, 남동생에게 SOS를 청한 후에야 나는 집에 갈 수 있었다. 설마. 그래 설마. 나도 내가 그렇게 심각한 길치일 줄은 몰랐다. 나도 어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왜 왼쪽, 오른쪽 구분을 못하냐고, 정신을 단디 차리라고 타박을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이건 공간지각 능력의 문제도, 집중력의 문제도 아니다. 길을 찾는 능력은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거다. 안타깝게도 천부적으로 길을 잃어버리는 능력을 타고난 나는, 지난 삼십 년 동안 헤매고 걸어 다닌 길들만 이어봐도 국토대장정은 거뜬히 다녀왔을 것이다.


길치의 답답함, 길치의 고단함, 그럼에도 길치의 멀쩡함을 담은 동화 한 편을 소개한다. 여기, 나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유은실 작가의 <멀쩡한 이유정>이라는 동화가 있다.


유은실 작가의 창작 동화 <멀쩡한 이유정>


무슨 사 학년이 일 학년 때부터 다닌 학교도 못 찾냐?


아홉 살짜리 남동생에게 구박을 받는 이유정. 올해로 사 학년인 유정이는 길치다. 살던 집이 재개발 지역에 포함되면서 아파트 단지로 이사 가는 바람에 유정이는 학교를 혼자 찾아가지 못한다. 개학을 하고부터 유정이는 이 학년짜리 남동생을 따라 학교에 다니는 처지가 된다.


유석아, 내가 너 따라다니는 거 비밀이야.

유정이라고 맘이 편할 리가 없다. 유정이는 길을 못 찾는 게 창피하다. 아홉 살짜리 남동생을 따라서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정이와 다툰 남동생이 저 혼자 홀랑 사라졌다. 게다가 오늘은 학습지 선생님이 오시는 날. 유정이는 세 시 이십 분까지 혼자서 집에 찾아가야 하는 엄청난 난관에 부딪힌다. 유정이는 무사히 집에 찾아갈 수 있을까?


‘나 홀로 집 찾기’에 도전하는 유정이

나는 정글짐 꼭대기로 올라가 목을 길게 빼고 옛날 우리 동네 쪽을 보았다. 동네 주변에 아파트 담벼락처럼 높은 막이 쳐져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옛날에는 좋았는데.’

나는 재개발 구역이 된 옛날 우리 동네가 그리웠다. 거기 살던 사람들, 고양이, 나무, 놀이터, 골목이 생각났다. 옛날 우리 동네는 집 모양이 달라서 구분이 잘 됐다. 비슷한 집도 담벼락 낙서, 금이 간 모양, 바랜 자국, 마당에 심은 나무, 쓰레기통 같은 게 조금씩 달랐다.

“휴.”

한숨이 나왔다. 나는 몸을 빙 돌려서 새로 이사한 동네를 보았다.

‘혼자 갈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아무리 봐도 교회 종탑 같은 게 안 보였다. 높은 건물이랑 더 높은 아파트만 보였다. 새로 이사한 동네는 집이랑 길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금 간 데도 없고 낙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 유은실 <멀쩡한 이유정> 중에서


유정이의 진땀 나는 길 찾기. 힘내라! 이유정!

나는 좌회전, 우회전 소리만 들으면 겁이 난다. 꼭 좌향좌, 우향우를 하는 것 같다.

“횡단보도 건너 좌회전, 횡단보도 건너 좌회전.”

아줌마 말을 외우면서 지갑을 가방에 넣었다. 가방을 메고 길을 건너면서도 계속했다. 그리고 좌회전을 내가 아는 말로 바꾸었다.

“좌회전, 왼 좌, 왼쪽 회전.”


... 뭔가 이상했다. 옆으로 돌아보니 거기도 횡단보도가 있었다. 나는 방향을 조금씩 바꾸어 가며 길을 찾았다. 계속 돌아도 생각이 안 났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횡단보도가 네 개나 있는 사거리에 서니까 정신이 없었다.


- 유은실 <멀쩡한 이유정> 중에서


아파트 단지에서도 길을 헤매는 유정이. 좌절하지 마, 유정아!

그야말로 고군분투! 손에 진땀을 쥐게 하는 스릴을 선사하는 길치 이유정의 집 찾기! 하지만 겨우 찾아온 아파트 단지에서 유정이는 좌절하고 만다. 열두 개의 동이 똑같은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유정이는 우리 집 102동을 찾을 수가 없다. 그때, 누군가 유정이를 부른다. 유정이는 한 줄기 빛과 같은 구세주를 만난다.



“유정아, 이유정!”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도 이번엔 학습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학습지 선생님이 나를 찾으러 나올 줄은 몰랐다. 갑자기 교회 종탑을 발견한 것 같았다.

“유정아.”

선생님은 오래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을 몰아 쉬었다. 나를 찾느라고 애를 쓴 것 같았다.

“유정아, 잘됐다. 나 너희 집 좀 데려다 줘.”

“예에?”

“아파트 단지를 십 분째 헤매고 있었거든.”

선생님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선생님 손을 꼭 잡고 치연아파트를 휘 둘러보았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서 좌향좌를 하는 것처럼 손에 진땀이 났다.


- 유은실 <멀쩡한 이유정> 중에서



두둥! 구세주가 아닌 더 심각한 길치의 등장! 길을 잃어버린 자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선생님마저도 길치였다. 유정이는 제시간에 집에 도착하지 못해서 학습지 선생님을 기다리게 할까, 부모님께 걱정을 끼칠까, 아니면 이대로 영원히 집을 찾지 못할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른인데도 아파트 동 하나를 제대로 못 찾는 더 큰 길치인 선생님을 만났을 뿐이다.


<멀쩡한 이유정>의 뒤통수를 치는 반전에 나는 바보처럼 실실 쪼갰다. 유정이의 성격을 고대로 빼다 박은 나의 어린 시절도 이렇게 진땀 나는 순간들이 많았더랬다. 길을 잘 못 찾는 건 둘째 치고, 꼬맹이답지 않게 별별 걱정을 다 하고, 실수할까 봐 긴장하고, 의기소침하게 쪼그라들어 한숨 쉬던 이유정이 바로 나였다. 나는 길을 못 찾는 것도, 수학을 못 하는 것도, 손에 땀이 많은 것도, 노래를 못 부르는 것도 누구한테 들킬까 봐 간이 콩알만 해지던 아주 소심했던 아이였다.


생각해보면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 모든 애들이 그랬다. 우리는 유정이가 이사 간 동네의 아파트 단지처럼 자랐다. 학교나 어른들은 우리를 고만고만한 재능에, 생김새도 가는 길도 다 비슷비슷하길 바랐다. 금 간 데도 없고 낙서도 없는 깔끔하고 똑똑한 아이들로 자라도록 가르쳤다. 내가 길을 못 찾는다고, 수학을 못 한다고, 손에 땀이 많이 난다고, 노래를 못 부른다고. “그래도 괜찮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른이 되고 보니 나는 그게 참 슬펐다. 어른들은 왜 다그치기만 했을까. 지적하고 고치려고만 했을까. 그리고   ? 틀린 수학 문제 숫자대로 손바닥을 맞으면서도 암말도 못했을까. 세상에, 정말 왜 가만히만 있었지? 어이가 없다. 정말로 어이가 없는 것은 길을 못 찾는 게 아니라, 다 똑같은 길로만 가는 거였다.


길을 못 찾아도 멀쩡한 이유정


삼십 년 길치 인생 선배로서 내가 유정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길을 못 찾아도 괜찮아


일 학년 때부터 다닌 학교를 못 찾아가는 사 학년이라도 괜찮아.

아파트 동 하나를 못 찾아서 꼬맹이에게 길을 묻는 어른이어도 괜찮아.

좌회전, 우회전을 헷갈려서 왼 좌, 오른 우를 중얼거리는 나도 괜찮아.

그게 뭐 어때서? 우린 멀쩡히 잘만 살아간다.


내가 무쟈게 길을 헤매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모든 길은 통한다. 내가 이리저리 골목길을 헤매도, 먼 길로 빙 둘러 걸어가도, 가로 막힌 길에 부딪혀 다시 돌아가도.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어쨌든 목적지에는 도착한다.


애초에 가려던 목적지가 아닌 생판 처음 보는 낯선 장소에 도착한다고 해도 괜찮다. 모험과 운명, 사랑 같은 것들. 예상치 못한 인생의 재미는 다 거기서부터 시작되니까.   



길치는 나서는 발걸음, 매일매일이 여행이다. 낯선 곳곳마다 발자국을 찍고, 진땀을 빼고, 우연히 사람들을 만난다. 길을 못 찾아도 괜찮다. 멀쩡히 잘만 살아가는걸. 길을 나섰다 하면 기본 한 시간, 동네 산책이 취미이고 버스 유랑이 특기인 나는 오늘도 멀쩡하다.


길치여도 괜찮아.
나 완전 멀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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