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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ug 17. 2015

월요일의 여배우

어떤 청년이 홀딱 반한 여배우

늦은 점심을 때울 겸, 시장통에 있는 국숫집에 들렀다. 냉모밀국수 한 사발을 시켜서 막 먹으려던 차에 청년 두 명이 들어와 내 뒤에 자리를 잡았다. 둘 다 20대 중반쯤 되었을까. 제법 큰 덩치에 우락부락한 생김새, 까치집 머리는 대충 모자로 눌러썼다. 나는 조금 쫄아서 고개를 숙이고 국수 한 젓가락을 집어 올렸다. 내 등 뒤로 걸걸한 목소리들이 오갔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아우 씨, 더워 죽겠네. 돈까스 콜? 근데 돈까스는 노량진 돈까스가 짱인데.”

“맞아, 졸라 싼데 대박 커. 노량진 돈까스는 나도 혼자 못 먹는다.”


“그래도 난 노량진은 다신 안 갈란다. 거기서 6개월 만에 미치는 줄 알았잖아.”

“거긴 사람 살 데가 아니야. 야, 뭐 먹을래?”


“일단 돈까스 하나랑 콩국수? 여름엔 콩국수지!”

“이모님, 저희 왕돈까스 하나하고, 콩국수 곱빼기 주세요.”



중간중간 친근한 욕설이 들리긴 했는데, 이모님께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두 친구가 참 귀여웠다. 나는 국수 면발을 후루룩 들이키며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화제는 어떤 여배우 얘기로 옮겨가 있었다. 그럼 그렇지. 여자 얘기가 빠질 리가 있나. 노량진에서 6개월 만에 미칠 뻔했다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



“야, 그 여배우 되게 예쁘지 않냐?”

“누구?”


“그 엄마 역할만 하는 여배우 있어. 이름이 김혜(?)... 김해(?)...”

“김혜수?”


“병신아, 김혜수가 무슨 엄마 역할을 해.”

“그르네. 그럼 김혜자?”


“아니야. 김혜(?)... 김해(?)... 그거 뭐지? 그 도둑들에 나온 여배우.”

“아~ 김해숙?”


“맞다, 김해숙! 야, 그 아줌마 예쁘지?”

“헐! 김해숙이 예쁘다고?”



헐! 나도 얘기를 듣던 친구의 반응과 다르지 않았다. 김해숙이 예쁘다는 친구의 얼굴이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뒤 돌아보면 내가 엿들었다는 걸 알아버리겠지. 나는 가려운 등을 긁지도 못하고 참는 것 마냥, 온몸이 다 근질근질한 기분이었다. 김해숙이 예쁘다던 청년이 이어 말했다.


김해숙, 우리 엄마랑 똑같이 생겼어.
김해숙 예뻐, 임마.


친구의 단호한 목소리가 내 등을 시원하게 긁어줬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해숙 아줌마 젊었을 때 사진 보고 대박 깜놀! 우리 엄마랑 완전 똑같아. 아, 우리 엄마도 진짜 예뻤는데.”

“그러고 보니 너희 어머님이랑 좀 닮은 것도 같다.”


“근데 그거 아냐? 김해숙 그 아줌마가 여기 저기서 연기 많이 해서 돈 많을 거 같지? 근데 아니래. 생활고 때문에 연기하면서도 지방 행사 뛰고, 돈 되는 건 다 하면서 힘들게 살았다더라. 뻔하지 뭐. 사업 실패하고, 빚더미 나앉고, 그거 갚으려고 아줌마 혼자 겁나 힘들게 산 거지.”

“그런 건 또 어디서 알았대?”


“암튼 새꺄, 우리 엄마도 예뻤는데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지금 그런 거야. 그 아줌마 보면 우리 엄마 같아서 되게 짠해.”

“하긴 너희 어머님도 참 힘들게 사셨지. 그러니까 임마, 이번엔 꼭 붙어라.”


“당근이지. 우리가 언제까지 여기서 이런 거나 먹고살 거 같냐. 얼른 돈 벌어서 우리 엄마 집 사줄 거다. 그나저나 배가 안 찰 거 같다. 왕만두 하나 더 시킬까?”

“삼천 원인데?”


“아 몰라. 그냥 시켜. 먹고살아야지.”

“그럼 니가 사는 거다.”



진지함과 싱거움을 오가는 두 친구의 대화를 듣다 보니, 어느새 나는 냉모밀국수 한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그러게. 김해숙 아줌마는 예쁘다. 나도 모르게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이모님, 저희 왕만두 하나 추가요.”

“곱빼기 같은 왕만두로요!”


두 친구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 궁금해서 찾아본 여배우 김해숙 씨의 젊은 시절.

정말 예쁘다. 청년의 어머니에게도 이런 꽃 같은 시절이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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