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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ug 14. 2015

금요일의 여름밤

달빛 아래 춤추는 바다, 그리고 엄마와 나

밤바다는 아름답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진 깜깜한 바다에는 빛들이 반짝인다. 백사장에 밀려와 스며드는 하얀 파도, 크고 작은 바위에 부딪혀 사라지는 은빛 포말들, 점점이 별자리처럼 깜빡이는 고기잡이배들,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에 빠진 달의 반영. 두툼한 융단 같은 물결 위에 하얀 달그림자가 일렁이고 크리스탈 같은 달빛이 사방으로 부서진다. 달은 바다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하늘과 바다, 언제나 그 가운데를 채우는 건 바람이다. 바람은, 파도와 공기와 소리와 냄새와 달빛을 흔든다. 그리하여 시간이 멈춘 곳,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환상의 공간으로 바다를 흔들어 깨운다.  


깨어난 바다는 처얼썩 처얼썩, 일정한 리듬을 만든다. 어둠 속에 사라졌다가 달빛에 드러났다가, 수줍은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바다는 거대한 몸을 일렁, 또 일렁 움직인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 4분의 3박자 느린 곡조의 왈츠. 바다의 춤은 우아하고도 서정적이다. 


바다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밤바다의 매력을 안다. 엄마와 나도 그랬다. 우리는 평생을 바다 곁에서 살았지만 환한 낮보다 아예 깜깜한 밤에 바다를 찾곤 했다. 늦은 밤, 사람도 없는 고즈넉한 바닷가에 우리 둘만 앉아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엄마와 나는 커피를 홀짝이거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내가 집을 떠난 후로 엄마는 혼자서 밤바다를 찾았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엄마의 결혼사진을 발견했다. 

클래식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엄마는 한 떨기 꽃처럼 붉고 예뻤다. 수줍은 미소와 발그레한 얼굴이 나보다 젊었다. 사진 속에 엄마는 시선을 떨구고 살포시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좋을 텐데, 엄마는 앞으로의 날들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조금은 슬퍼 보였다. 꽃이 시들고 저버릴 날을 알고도 피는 것처럼 엄마는 모든 걸 다 알고도 시작하는 것 같은 초연한 얼굴이었다. 그런 엄마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엄마가 홀로서기를 결심했을 때는 내가 열일곱, 엄마는 마흔이었다.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겨우 열 살이 많았다. 엄마의 예쁜 얼굴이 푸석해지고 고운 손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엄마는 힘들다는 내색 한 번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냥 묵묵히 가장으로 살아왔다. 


엄마는 14년째 혼자였다. 내가 몇 번의 연애를 하고 이별을 했을 때도 엄마는 혼자였다. 내가 제짝을 찾아 시집을 갈 때도 엄마는 혼자였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의 등을 바라보며 결혼식장에서도 엄마는 혼자 앉아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장을 보러 갈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잠을 잘 때도, 바다에 갈 때도 엄마는 늘 혼자였다. 


엄마는 힘없고 쉬운 여자로 보이면 안 된다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엄마는 언제나 깔끔하게 차려입고 작은 새처럼 조용히 걸었다. 말투도 조곤조곤 상냥했다. 홀어머니로 우리 남매를 키우면서 자칫 소문이라도 잘못 날까 봐 엄마는 노심초사했다. 집안에 무거운 짐 한 번 옮겨달라 누구에게 부탁한 적이 없었다. 입에 풀칠할 여유가 없다고 하여 빌어먹고 살지도 않았다. 사는 게 힘든 친구들 집 앞에 찾아가서 약간의 돈 봉투를 쥐여주고 돌아와, 엄마는 국에 밥 말아 먹는 게 다였다. 


엄마는 곽재구 시인의 시 ‘사평역에서’를 적어서 벽에 걸어두었고, 그 시를 바라보며 커피를 꼭 반 잔씩만 천천히 마셨다. 집안 가득 많은 책을 쌓아두었지만 어느 구석 하나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엄마는 작은 식탁 위에 마른 꽃을 꽂아두고 오래된 항아리에 투박한 식물들을 심어 길렀다. 그리고 종종 길고양이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고양이 길마다 몰래 먹이를 놓아 두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면 엄마는 혼자서 바다를 찾았다. 그리고 달빛 아래에서 춤추는 바다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총총총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껏 내가 본 엄마는 우아하고 기품이 넘쳤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엄마는 매화야. 
매화는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아. 
딸, 가난하게 살아도 네 마음을 팔지는 마. 



엄마는 그렇게 혼자서 살아왔다. 집안 한 편에 걸린 곽재구의 시처럼 엄마는 아무 말도 없이 살아왔다. 싸륵싸륵 눈꽃이 쌓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엄마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지며 살아왔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우리는 꼿꼿하게 참으며 잘 살아왔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마음이 아픈 건, 결혼을 하고 나니 이제야 엄마가 여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몰랐다. 엄마가 그렇게 예쁜 아가씨였는지, 그렇게 일찍이 결혼하고 나를 낳았는지, 엄마도 나처럼 사랑받고 싶은 여자였는지. 


엄마는 한 떨기 매화처럼 붉고 아름다운 시절을 혼자서 팍팍하게 살아왔다. 다 시든 꽃잎만 남은 그나마의 인생마저도 우리에게 바쳤다. 엄마가 얼마나 가여운 여자였나. 엄마가 얼마나 외로운 여자였나. 생각하면 나는 코끝이 찡해진다. 


윈슬러 호머 Winslow Homer [여름밤 (Summer Night)] 1890

우리가 힘들었던 날에 나는 이 그림을 보며 미소 지었다. 윈슬러 호머가 그린 ‘여름밤’이라는 그림이었다. 화가는 우리처럼 밤바다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었다. 찬란한 여름 밤바다, 그리고 달빛 아래에서 춤추는 두 여자. 백 년도 더 전에 화가는 두 여자를 그렸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보자마자 확신했다. 달빛 아래에서 춤추는 두 여자는 틀림없이 엄마와 나였다. 우리가 자주 가던 밤바다에서 꼬옥 껴안고 추는 엄마와 나의 춤이었다. 


바람이 잔잔하고 파도 소리가 평화롭고 달이 가장 밝은 어느 여름밤이다. 처얼썩 처얼썩. 바다는 노래한다. 어둠 속에 사라졌다가 달빛에 드러났다가, 수줍은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바다는 거대한 몸을 일렁, 또 일렁 움직인다. 4분의 3박자 느린 곡조의 왈츠. 바다는 우아한 춤을 춘다. 


그 곁에서 엄마와 나는 양손을 맞잡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우리 둘만. 모든 빛이 부서져 찬란하게 빛나는 밤바다에서 우리는 행복한 춤을 출 것이다.


스텝 같은 건 몰라도 돼, 엄마. 

그냥 껴안고 빙글빙글 돌기만 해도 좋아. 


나는 그렇게 엄마와 춤을 추고 싶었다. 엄마를 껴안고, 엄마의 앙상한 등을 쓰다듬고, 엄마 냄새가 나는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느리게 쿵짝짝 쿵짝짝. 엄마와 춤을 추고 싶었다. 그리고 조용히 엄마에게 속삭이고 싶었다. 



사랑해, 명숙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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