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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ug 25. 2015

이유진

팔월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엔 거기 말고

스물두 살의 국문학도 유진이 원고를 도서관에 두고 온 건 작은 사건이었다. 뒤늦게 깨닫고 다시 돌아간 도서관 어디에도 유진의 원고는 없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면서 쓴 글이었다. 복사본도 없었고 유일한 최종본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부주의한가,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가. 아냐, 다시 생각을 해보자. 첫 문장을 떠올려봤다. 세상에!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쓴 원고의 첫 문장조차 까마득한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가. 유진은 좌절했다. 유진이 원고를 잃어버린 건 사고였다.


다음 날, 국문과 안교수가 유진을 불렀다. 유진은 의아했다. 학과에서 존재감도 없는 유진을 어째서 부르는 걸까? 교수실에 긴장한 채 앉아 있는 유진에게 안교수는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유진의 원고였다. 지난밤 도서관에 들른 안교수가 책상 위에 놓여있던 유진의 원고를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작가는 원고를 제 몸처럼 아껴야 해.”


서류봉투 겉면에는 ‘국문과 13학번 이유진’이라고 적혀있었다. 안교수가 펜으로 직접 쓴 배려였다. 그의 성격만큼이나 깔끔한 글씨체였다. 유진은 제 원고를 끌어안았다. 안교수의 따뜻한 배려와 원고를 찾았다는 기쁨에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유진이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가 봐?”


네, 유진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글 참 잘 썼더라. 멋져.”


안교수가 웃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유진의 속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이 울렁거림이 무섭거나 두렵진 않았다. 그냥 좋았다. 이상했다. 커다란 파도를 그대로 맞닥뜨리고도 아주 멀쩡한 느낌. 아! 유진은 깨달았다. 유진이 책상에 원고를 두고 나왔던 사건과, 원고를 잃어버렸던 사고와, 안교수가 유진의 원고를 발견한 우연은 결코 단순한 것들이 아니었구나. 그랬다. 안교수가 유진의 원고를 읽고 유진에게 말을 건넨 건, 이 모든 것들이 촘촘히 연결되어 만들어진 운명이었다.


유진은 강의실로 돌아가면서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바로 곁에 안교수가 서 있는 것 같았다. 강의시간에도 안교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심장이 엄청나게 빠르게 뛰었다. 왜 이러지? 멍하니 복도를 걸어가던 유진은 무심코 다시 안교수와 마주쳤다. 그 순간, 유진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심장이 저릿하고 가슴이 떨렸다. 그날부터였다. 유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설레는 사람이 생겼다.


교수라는 직함은 뭔가 나이가 지극하고 위엄 있는 학자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안교수는 서른일곱 살의 젊고 잘생긴 교수였다. 언제나 화이트 셔츠에 수트를 갖춰 입는 시크한 스타일을 고수했다. 얼굴 역시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에게도 사춘기 시절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깨끗하고 하얀 피부에 큰 눈과 오뚝한 코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자주 밤샘 연구에 몰두한 탓에 그는 얼굴빛이 파리하고 늘 피곤해 보였는데, 검은 눈동자만은 언제나 총총 빛났다. 그는 마치 헤르만 헤세의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인물이었다. 차갑고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젊은 학자, 어딘가 몰두하여 다른 세상에 빠져있는 듯한 그의 모습은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다.



원고를 계기로 안교수와 유진은 종종 대화를 나누는 사제지간이 되었다. 그날도 그랬다. 안교수와 유진은 오렌지색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정확히 두 사람을 비췄다. 유진의 머릿결을 스치고, 안 교수의 하얀 목선을 비추었다. 유진은 정말 신기했다. 햇빛이 우리 둘만 비추고 있었다. 작은 책상, 작은 소파가 전부인 이 비좁은 공간이 이렇게나 따뜻하게 느껴지다니. 유진은 온실 속에 핀 해바라기처럼 햇빛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따뜻한 빛이 유진의 양 볼과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유진은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 따뜻한 공간에서 안교수와 유진은 대화를 나눴다. 요즘 글은 잘 쓰니, 어떤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니, 힘든 건 없니, 어떤 작가의 책을 읽었니. 거의는 문학에 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안교수의 사적인 이야기도 있었다. 유진은 그것들을 빠짐없이 기억했다. 그는 철학을 매우 좋아했다. 특히 라캉에 관련된 책이라면 모두 읽고 논문을 썼다. 또 그는 진지한 사람으로 보이는 게 싫은 사람이었다. 그는 진지한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하고 싶은 게 아주 많았다. 기타도 잘 치고 싶고, 오카리나도 잘 불고 싶고, 피아노도 배우고 싶고, 좋은 사진도 많이 찍고 싶다고 말했다. 둘이 똑같이 좋아하는 것들도 발견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푸른 나뭇잎들 사이로 비치는 햇빛. 특정한 하늘과 햇빛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한 유진은 너무너무 좋아서 그만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모든 대화가 끝나고 안교수는 유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힘내라는 격려의 표현이었지만,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유진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혹시 이 사람도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이 따뜻한 손이 더 오래 머물렀으면. 그와 헤어지고 나서는 더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내가 너무 귀찮게 군 건 아닐까. 아까 그 말은 하지 말 걸 그랬어. 내가 더 많이 웃어줄걸. 유진은 제 손목을 가만히 쥐었다. 대화를 나누다 설핏 스친 손목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쿵쿵 쿵쿵. 더운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이 마음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그를 좋아하는 이유 자체가 없어졌다. 그냥 좋았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너무 좋았다. 유진은 생각했다. 교수님이나 몰래 짝사랑하는 자신은 어리바리한 풋내기에 정말이지 불쌍한 여자애라고.


어떤 날은 안교수가 ‘고맙다’라고 보낸 메시지를 캡처해두고 몇 번이나 들여다보며 미소 지었다. 또 어떤 날은 대화를 나누다가 찰나의 호흡이 부딪친 순간 때문에 종일 머리가 들떴다. 또 어떤 날은 보는 영화마다 모든 주인공이 안교수로 리플레이 되는 것이었다. 영화 주인공의 얼굴과 말투로 그는 유진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아, 이게 진짜로 이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 속에 나는 고마운 제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데. 더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은 욕심일까. 유진은 하루하루가 행복하고도 괴로웠다. 애틋하고도 슬펐다.



유진은 여름에 태어났고, 안교수는 겨울에 태어났다. 중학생인 안교수가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있을 때, 유진은 갓난아기였다. 대학생인 안교수가 라캉의 이론을 연구할 때, 유진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열다섯 살의 나이 차는 커다랗고 새까만 블랙홀 같았다. 우리 사이엔 시간도 깊이도 알 수 없는 뻥 뚫린 어둠만이 채워져 있었다.


유진의 스물두 번째 생일날, 유진은 잠자리에 누워 ‘시와’의 노래 ‘크리스마스엔 거기 말고’를 들었다. 그의 생일도 바로 내일, 한여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유진은 눈 내리는 팔월의 크리스마스를 상상했다. 어느 눈 내리는 여름, 함께 맞이할 그의 생일을 상상하며 노래를 재생했다.


사람들 넘치는 그런 곳은 가기 싫어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밝혀두고

사람들 넘치는 그런 곳은 가기 싫어

흐르고 흘러도 멈춰 있는 것 같은 시간 속


흐르고 흘러도 멈춰 있는 것 같은 시간 속,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그 어마어마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좁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래도 불가능한 꿈을 꾸며 유진은 눈을 감았다.



안교수를 사랑한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유진은 그날도 먼발치에 앉아서 그의 강의를 들었다. 수업 막바지에 안교수가 말했다.


“다들 덥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있는데, 오늘은 이 노래로 마무리하지.”


안교수가 볼륨을 높였다. 맑은 목소리의 여가수 독백을 하듯 담담하게 읊조렸다.


사람들 넘치는 그런 곳은 가기 싫어


유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와의 노래 ‘크리스마스엔 거기 말고’였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가수의 노래를 안교수가 알고 있다니. 게다가 그를 생각하며 밤마다 듣던 바로 그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니. 유진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다면 안교수도 나처럼 힘이 들 때마다 혹은, 나처럼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 주부터는 항상 이 노래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겠구나. 유진은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이 사람과 나는 대단한 운명 같은 공통점을 발견한다 해도 결국, 만날 수가 없구나. 새까만 블랙홀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위성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당신을 따라 빙글빙글 도는 것, 그뿐이구나. 울고 싶었다. 유진은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온통 초록과 노랑으로 빛나는 캠퍼스는 찬란했다. 전공 책을 껴안고 달려가는 학생들, 삼삼오오 모여 시끌벅적 수다를 떠는 아이들, 팔짱을 끼고 오가는 커플들, 구슬땀을 흘리며 운동장을 누비는 남자들, 짧은 치마와 붉은 입술이 싱그러운 여자들, 뜨거운 젊음과 소란한 열기로 가득 찬 캠퍼스는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들을 바라보고 선 유진은 저 혼자 훌쩍 나이가 들어버린 기분이었다. 어리고 뜨거운 너희는 절대로 모를 사랑, 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다고. 유진은 그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유진은 이어폰을 끼고 ‘크리스마스엔 거기 말고’를 재생했다.



사람들 넘치는 그런 곳은 가기 싫어

아무 일 없다는 듯 가면을 쓴 것처럼

사람들 넘치는 그런 곳은 가기 싫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그런 인파에


거기 말고 따뜻한 우리 집에서

그냥 나와 못다 한 얘기나 할까


사람들 넘치는 그런 곳은 가기 싫어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밝혀두고

사람들 넘치는 그런 곳은 가기 싫어

흐르고 흘러도 멈춰 있는 것 같은 시간 속



내 이름이 조금만 더 특이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럼 나를 기억하기 쉬울 텐데요. 당신은 앞으로도 수많은 제자를 만날 거고, 분명 흔하디흔한 이유진이란 똑같은 이름의 친구들과 수업을 하겠죠. 그래도 그 친구들 말고 내가 첫 번째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언제 당신과 함께 밥 한 끼 먹고 싶어요. 밥을 먹으면서 당신은 어떤 습관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밥을 먹는지 보고 싶어요.


내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알아차리는 순간이 조금 늦어도 괜찮아요. 그냥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것만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내 이름 세 글자와 내 모습과 함께.


그리하여 언젠가. 크리스마스엔 거기 말고 따뜻한 우리 집에서 그냥 우리 못다 한 얘기나 했으면, 정말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 긴 메일로 당신의 이야기를 나눠주어서 고맙습니다. 생일 축하해요.


시와_ 크리스마스엔 거기 말고

https://youtu.be/n2RZ1v5U-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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