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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ug 18. 2015

김효진

런던 남자와의 소개팅

효진은 사흘 뒤면 런던행 비행기를 탈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딸, 그 집안이 건물만 몇 개래. 들어보니까 그 집 아들이 가 이어받을 생각은 안 하고 외국으로만 떠돈다네. 그러니 집안에선 복장 터지는 거지. 어디 그냥 참하고 멍청한 여자 하나 만나서 한국에 있었으면 하는 거야.”

“뭐? 엄마, 그럼 내가 참하고 멍청한 여자라는 거야?”


“솔직히 니가 똑똑한 건 아니잖아? 그리고 그 성질만 죽이면 얼굴은 좀 참해? 니가 얼굴이라도 반지르르해서 천만다행이다, 이것아.”

“진짜 이 엄마는 딸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효진아, 엄마는 니가 그런 집에 시집가서 마냥 놀고먹었으면 좋겠어. 그게 행복인 거야. 기지배야, 머리 굴리지 마. 아무 생각도 하지 마. 그냥 눈 딱 감고 나가기만 해. 혹시 알아? 운명일 수도 있잖아!”



하! 엄마의 열변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마침내는 엄마 입에서 ‘운명’이란 단어가 튀어나오자, 효진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됐다. 말을 말자. 그렇게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나온 자리였다. 낼모레 런던으로 떠날 남자랑 억지로 얼굴이라도 마주하라는, 참으로 희한한 선 자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결혼하게 되리라’는 강력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엄마야, 엄마 말이 맞았다. 거짓말처럼 남자는 운명이었다.  



“반가워요, 효진 씨.”



남자가 웃었다. 남자는 긴 입꼬리를 가졌다. 곡선으로 휘어지는 눈꼬리, 그 역시 길고 부드러웠다. 까만 앞머리가 그의 창백한 얼굴에 드리워져 고독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위로 도드라지는 오뚝한 코. 옅은 채도와 짙은 음영을 가진 얼굴이었다. 그림 같다. 남자의 어눌한 말투 때문일까. 동양인이 분명한데도 그는 뭔가 이국적인 느낌을 풍겼다.  


남자는 런던에서 미술을 전공한 디자이너라고 했다. 어쩐지. 그에게선 특유의 예술가 기질이 느껴졌다. 효진은 남자를 상상했다. 우울한 회색 도시를 걷는 동양 남자. 검은 코트 깃을 세우는 그. 그를 만지면 까끌까끌한 질감이 느껴질 것 같았다. 도시를 배경으로 오돌도돌 돋아난 그, 효진의 여린 손바닥을 주욱 할퀴어버릴 그 얼얼한 느낌. 그럼에도 그는 고급스럽고 세련된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섹시했다.


남자가 커피를 마셨다. 자연스레 그의 입술에 눈길이 갔다. 입술이 터서 메말랐다. 효진은 자신의 손가락을 그 입술에 갖다 대고 가만히, 오래, 천천히.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효진은 긴장했다. 첫눈에 그가 마음에 들었다. 별 기대 없이 나온 자리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무슨 떨어지기로 작정한 면접 마냥, 출근용 정장 치마를 대충 입고 나온 자신을 후회했다. 힐도 신경 써야 했다. 헤어도, 메이크업도, 스타킹도. 구석구석에 닿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효진 씨는 눈썹이 예쁘네요. 치아도요. 손톱도 예뻐요.”



불편하다. 그는 다른 남자들과는 달랐다. 치아랑 손톱까지 보는 남자가 어딨냐고. 여태까지 수십 번의 소개팅을 해봤지만, 치아가 예쁘단 말은 또 처음 들었다. 초조하다. 하필이면 그는 중저음에 이상적인 목소리를 가졌다. 남자가 효진을 비꼰다고 해도, 이 목소리라면 달콤한 속삭임으로만 들릴 것이다. 불편하고 초조한 이 남자에게 효진은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허를 찌르는 아찔한 긴장감에 허리가 저절로 꼿꼿이 섰다. 이런 때일수록 침착하고 또 태연하게 행동해야 한다.


효진은, 고마워요. 가볍게 미소 짓고 그의 손톱을 내려다봤다. 자르지 않은 그의 손톱이 길다. 그마저 깔끔해 보인다니. 효진이 불리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했다. 그의 손톱을 만지고, 그의 손등을 쓰다듬고 싶었다. 그의 관심사는 뭘까. 어떤 얘기를 해야 할까. 다행히 효진은 그림에 조금 관심이 있었다. 대충 이름을 들어본 화가라면 모조리 다 들이대 볼 마음이었다.



“저는 그림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화가라면, 음... 샤갈, 모네...”

“그럼, 터너도 좋아하겠네요.”


“맞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색을 그렸어요. 색채의 시작. 그 그림이요.”

“효진 씨가 좋아할 줄 알았어요.”


“그리고... 뭉크, 마티스? 아, 어떤 화가 좋아하세요?”

“전 프랜시스 베이컨이요.”



남자가 효진의 손을 살짝 터치하며 대답했다. 효진은 움찔했다.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남자가 효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는 남자는 민망할 정도로 아이 컨택에 능숙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화가의 그림은 심상치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효진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도 이 남자에게만큼은 침착하고 태연해 보이기로 작정했으니까. 효진도 익숙지 않은 아이 컨택을 시도했다. 1초, 2초, 3초. 멀뚱히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지만 곧 효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남자가 크게 웃었다.



“효진 씨, 귀엽네요. 밝은 모습이 부러워요.”



남자가 미소 지었다. 곡선으로 휘어지는 눈꼬리가 길고 부드러웠다. 아이 컨택의 여파는 엄청났다. 심장이 쿵쿵 귀에서 뛰었다. 아무래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봐요, 내가 당신에게 완전히 빠졌다고요. 남자가 미소를 거두고 효진을 빤히 쳐다봤다. 한참이나. 효진은 고스란히 남자의 시선을 받으며 애꿎은 그의 코트 깃만 쳐다보았다. 남자가 말했다.    



“좀 걸을래요?”



카페를 나서자 찬바람이 훅 끼쳐 들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늦가을 같은 스산한 초겨울이었다. 어두워지는 거리는 채도를 잃어가고 있었다. 우울한 회색들, 콘크리트와 벽돌과 건물과 가로수들. 고독한 거리.  



“런던 거리가 아마 이런 느낌일까요?”

“흠... 오늘 날씨와 비슷한 편이죠.”



효진은 말이 없어졌다. 어디를 향해 걷는지도 몰랐다. 무작정 그의 발길을 따라 걸었다. 효진은 머리가 복잡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생각이 많아졌지만, 대체 그 생각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정리도 되지 않았다. 그냥 이 만남이 복잡하고 아득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한편으론 ‘우리는 결혼하게 되리라’는 강력한 예감이 주문처럼 맴돌았다. 불쑥 남자가 물었다.



“안 추워요?”

“추워요.”



효진은 남자의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숙이고, 효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효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앞이 하얗다. 메마른 그의 입술이 강하게 느껴졌다. 될 대로 되라지. 효진은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하얗다. 아, 너무너무 하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흘 뒤면 런던행 비행기를 탈 남자는,

그리고 사흘 뒤에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떠나버렸다.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효진의 예감은 틀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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