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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Dec 26. 2023

존중받는 기분이 들 때

동아일보 [관계의 재발견]

동네에서 낯익은 이를 마주쳤다. 한때 우리 집을 방문했던 정수기 관리원 아주머니. 일곱 살 쌍둥이 형제가 꾸벅 인사하자 아주머니가 반색하며 웃는다. “기억해요, 고객님. 갈 때마다 환하게 맞아주셔서 감사했거든요. 아드님들 많이 컸네요. 어쩜 든든하시겠어요.” 아주머니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


아이들이 태어난 지 백일 무렵, 엄마가 도와주러 올라왔다. 마침 정수기의 첫 방문 점검이 예정된 날이었다. 집에 온 엄마는 청소부터 시작했다. 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고 수북이 쌓인 택배 상자들을 치웠다. 주방과 거실을 부지런히 쓸고 닦더니 “몇 시에 오신다니?” 불쑥 물었다. 정수기 점검? 의아해하는 나에게 엄마는 일러주었다. “집에 사람이 오잖아. 너저분하면 안 된다. 예의야 그건.”


몰랐던 엄마 얘기를 들었다. 우리 남매가 제법 자랐을 때, 엄마는 학습지 방문교사 일을 시작했다. 단정한 차림에 구두를 신고 집집마다 시간 맞춰 방문하는 일은 고됐다. 종일 주택가와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녀야 했는데, 엘리베이터 없는 연립주택 꼭대기 층이라도 오르내리자면 금세 지쳐 버렸다. 비나 눈이 오면 또 얼마나 고생인지. 그래도 나름의 동선과 요령이 생겨서 일은 금방 몸에 익었다.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건 낯선 집에 들어가는 일이었다고. 누군가의 집이 엄마에겐 일터였으니까. “현관에 가지런히 신발이 정리된 집에 들어설 때가 제일 감사했어. 부러 청소한 티가 났거든. 잠시 머무는 자리라도 주위가 깨끗하다면 존중받는 기분이 든단다.”


그날, 엄마의 손길로 깨끗해진 집에서 정수기 관리원 아주머니를 처음 맞았다. 이후로도 가스 검침원이나 아파트 소독원이 방문할 때 되도록 집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익숙한 우리 집이 누군가에겐 낯선 일터일 테니까. 실은 우리 엄마 생각이 나서 예의를 다하고 싶었다.


여전히 기억한다. 아이들 돌치레에 부쩍 지쳐 있던 시기, 정수기 관리원 아주머니가 방문했다. 아기 울음소리에도 차분하게 일하던 아주머니가 “힘들죠?”라며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아기들이 좀 순한 편이라.” 인사치레로 묻는 말들조차 괜히 예민하게 느껴지던 때였다. 그냥 어물쩍 넘어가려는데 아주머니가 말했다. “세상에 순한 아기가 어딨어요. 그냥 엄마가 감당하는 거죠.” 참견도 훈수도 아닌 담담한 그 한마디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울컥했다. “엄마 되기 참 쉽지 않네요.” “그럼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직업일 거예요.” 아주머니는 기억 못 할 테지만 그때 정말 감사했다. 익숙한 우리 집에서 엄마라는 낯선 직업을 힘들어하던 내가, 비로소 존중받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지난 10월 26일자 동아일보 관계의 재발견, 일주일째 열이 안 떨어지는 아이들 간호하며 썼던 글이었습니다. 동동거리며 열이 40도까지 오르내리는 아이들 간호하며 작업하고 수업하는 작가 엄마는, 여전히 엄마라는 직업이 가장 힘들고 어렵습니다. 밀린 일들 밤샘 작업하고 맞이한 아침. 누군가 꾸역꾸역 삼키던 말들 가끔 털어놓는대도 담담하게 대답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힘들죠? 힘든 일, 그래도 잘 하고 있다고요. 아주머니가 해준 얘기가 아직도 힘이 된답니다. 


존중받는 기분이 들 때[관계의 재발견/고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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