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수리 Dec 26. 2023

우리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동아일보 [관계의 재발견]

지금도 그리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 대전에 어느 책방을 다녀왔다. 널따란 나무 테이블 하나와 의자 열 개가 전부인 작은 책방. 테이블을 중심으로 한쪽은 서가를 꾸려둔 책방, 한쪽은 음식을 만드는 부엌이었다. 테이블은 때때로 책을 읽는 책상이기도 음식을 나누는 식탁이기도 했다. 테이블에 둥글게 마주 앉은 사람들은 책과 음식, 그리고 대화를 나누었다.


책방지기의 간곡한 초대 편지를 받고 나는 대전행 기차에 올랐다. 초겨울 변덕스러운 일교차에 으슬으슬 감기 기운이 돌았다. 게다가 빈속이었다. 누구나 예민한 구석 하나쯤 있을 텐데 나는 낯선 자리에 나설 땐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강연이나 북토크라면 더더욱. 모객이 안 됐다면, 사람들이 날 모른다면, 실수라도 한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날 싫어하게 되면 어쩌지. 긴장과 걱정으로 속도 마음도 뚝뚝하게 굳어버렸다.


조용한 주택가에 덩그러니 책방이 있었다. 김 서린 유리문을 열자, 와락 훈기가 달려들어 껴안아 주었다. 책장 전면에 내 책들이 전시되어 있고 테이블에 독자들이 앉아 있었다. 책방지기가 웃으며 나를 반겼다. “여기 앉으세요.”


다행이었다. 푸르르 주전자가 끓어오르는 책방 난로처럼 따스하고 훈훈한 시간을 보냈다. 예정된 시간을 넘기고서야 모두 헤어졌다. 그사이 창밖엔 어스름이 내렸다. 나도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다. “오가는 길 고생스러우셨죠? 출출하실 것 같아 토마토수프를 만들어 뒀어요. 따뜻하게 같이 먹고 가요.”


책방지기는 토마토수프를 냄비째 테이블에 가져왔다. 김이 폴폴 나는 주홍색 수프. 채소들 다져 넣어 오래 뭉근히 끓인 수프를 그릇에 나눠 담아, 우리는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문 닫은 책방에 주홍 불빛 하나 빛나고, 수프를 먹으며 조곤조곤 대화 나누던 우리 얼굴도 토마토수프처럼 발그레해졌다. 바깥은 겨울인데 테이블은 따뜻했다. “언제 오실까 기다렸어요. 멀리까지 와주셔서 기뻐요.”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여기 앉으세요” 말을 건네는 것. 어떤 책에서 진정한 환대란 그런 것이라고 읽었다.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한다는 환대(歡待)의 한자 뜻은 ‘기쁘게 기다린다’. 반기는 마음 이면에는 기쁘게 기다리는 마음이 스며 있는 걸까. 떠들썩하지 않아도 조용한 대접에서 나를 기쁘게 기다려 왔음을 짐작할 때 어쩔 도리 없이 마음을 내어주고야 만다. 그 겨울, 책방을 나서며 예감했다. 진정 환대받고 싶을 때 다시 여기 문을 열게 될 거라고. 환대와 정성이 담긴 그날의 테이블은 내 마음속에서 여전히 따뜻하다.



12월 8일자 동아일보 칼럼 [관계의 재발견], 환대받았던 경험을 썼습니다. 내 영혼의 토마토수프를 먹었어요. 겨울만 되면 그날의 토마토수프가 그립답니다. 글에 등장했던 고등어책으로 찾아갔던 대전 한쪽가게에 <선명한 사랑>으로 다시 다녀왔어요. 환대와 다정이 머무는 테이블에 우리는 다시 마주 앉아.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갈 장소가 있다는 것, 시간의 흐름이 신기하고 아름답습니다. “여기 앉으세요.” 누군갈 기쁘게 기다리는 하루 보내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