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관계의 재발견]
연말이라 시상식이 많다. 올해 우수한 역량을 펼친 빛나는 이들이 환호 속에 레드카펫을 걸어간다. 하지만 빛나지 않더라도 걸어갈 수 있지. 특별했던 레드카펫을 기억한다.
아이들 유치원에서 운동회가 열렸다. 원아들의 형제자매 부모 조부모까지 총출동한 가족운동회였다. 다 같이 ‘통천 펼치기’라는 활동을 했다. 카펫처럼 돌돌 말린 기다란 천을 펼쳐서 부모들이 팽팽하게 맞잡으면 어린이들이 천 위를 걸어간다. 팬데믹 이후 3년 만의 운동회였기에 특별히 원아들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까지 모든 어린이가 함께했다. 우리는 홍팀, 수십 명의 어른이 붉은 천을 펼쳐 맞잡았다. 그야말로 레드카펫이었다.
어른들이 맞잡은 레드카펫 위를 어린이들이 걸어갔다. 막 걸음마를 뗀 세 살배기가 아장아장 걸었다. 한 어린이는 긴장한 얼굴로 조심조심 걸었고, 다른 어린이는 달리기 경기처럼 와다닥 달렸다. 어떤 어린이는 넘어져 울면서 다시 걸었고, 또 어떤 어린이는 우당탕 온몸을 구르며 지나갔다. 누가 먼저인지 누가 빠른지 겨루는 경기가 아니었다. 단지 이 길을 모두가 끝까지 무사히 걸어갈 뿐이었다.
어른들은 애쓰며 튼튼한 레드카펫을 만들었다. 어린이들이 잘 걸어가도록, 천을 팽팽하게 맞잡아 경사를 완만하게 만드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내 아이만 보지 않았다. 어린이들 한 명 한 명을 마주 보고 응원했다. 넘어지거나 우는 어린이에겐 ‘괜찮아!’, 끝까지 무사히 걸어간 어린이에겐 ‘잘했어!’ 소리쳤다. 지나간 어린이들이 보지 못하는 뒤편에서도 힘차게 응원하고 격려했다.
“이게 뭐라고 뭉클할까요.” 나도 모르게 옆 사람에게 말했다. 몸집 우람한 어느 아버지가 눈시울을 붉히며 대답했다. “정말 멋지네요.” 우리 모두에게 운동회 도장을 꽝 찍어주고 싶은 장면이었다. 참! 잘했어요.
우리가 뭉클했던 이유. 이름 모를 한 사람 한 사람을 응원하고 응원받았다. 레드카펫이 끝나고도 삶은 계속된다. 다 다르게 걷던 어린이들은 응원과 환호가 잦아진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며 어른이 될 것이다. 순탄치만은 않을 막연한 인생이란 길. 먼저 걸어본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응원하고 격려한다. 남들과 겨루지 않고도 그저 자기답게 무사히 걸어갔으면 좋겠다고. 보이지 않지만 애쓰며 지켜보는 이들이 도처에 있다.
올해 마지막 인사를 뭐라고 전할까. 이름 모를 당신이 빛나지 않더라도 힘을 냈으면 좋겠다. 올 한 해 넘어진 사람도 뒤처진 사람도 울어본 사람도, 모두 괜찮다고 다시 걸어가면 된다고 응원을 전한다. 당신의 존재와 걸음과 지나온 날들과 나아갈 날들에 박수를 보낸다. 귀한 사람, 올해도 참! 잘했어요. (23.12.29)
2023년 마지막 동아일보 [관계의 재발견] 칼럼, 유치원 운동회 레드카펫에서 울컥했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분량상 쓰지 못했지만 붉은 천을 맞잡은 부모들이 하나둘 손을 흔들고, 손을 내밀어 걸어오는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했어요. 마치 태어나길 잘했다고 반겨주는 사람들 같았죠. 크고 작고 다른, 사람과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 일어나는 무언가에 저는 여전히 쉽게 반하고 깊게 감응합니다. 내년에도 맑은 눈으로 잘 발견해볼게요. 우연히 이 글을 읽을 당신에게, 당신의 존재와 걸음과 지나온 날들과 나아갈 날들에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