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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Jun 23. 2023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쓰면서 함께 걸어요

서로 스승이자 친구가 되는 사우(師友)의 길

한 사이버대에서 3년째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만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온라인에서 만난다. 처음 화상수업으로 학우들을 만났을 때 자세부터 바르게 고쳐 앉았다. 정작 교수가 가장 어렸다. 부모뻘인 초로의 학우들은 뜨겁게 공부했다. 배움의 열정 따라 가르침의 열정도 벅차올라 우리는 밤늦도록 서로의 글과 삶을 나누며 교우했다.


수업에는 장애 학우가 일곱 명. 투병하며 공부하는 학우들, 자판 하나하나 눌러 쓰는 고희의 학우들이 있다. 타지에서 시차를 이기며 새벽 수업 듣는 학우들, 한부모 가정의 가장으로 돌봄과 학업을 병행하는 학우들이 있다. 생계를 이어가며 글 쓰는 경찰관, 간호사, 소방관, 경비원, 환경미화원, 판매원, 회사원, 교사, 사육사, 약사, 노동자가 있다.


최선을 다해 학우들의 글을 읽고 보살핀다.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 기적처럼 남은 벚꽃 한 송이를 본 희망, 호스피스 병동에서 나무처럼 아내 손을 잡고 지키던 어느 노인의 배웅, 문맹인 어머니가 불러주던 이야기를 받아써 주다 깨친 인생의 슬픔, 망해 가는 가게를 지키며 김밥을 말다가 자식들 생각에 ‘그래도 살아야지’ 퍽퍽하게 삼키던 김밥의 맛, 표정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여전히 마스크를 착용하는 판매원의 심정, 외국인 노동자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며 깨달은 편견의 부끄러움, 병상에서 생사를 오가면서도 자기 존엄을 지키려는 최전선의 글쓰기, 공장 기계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글 쓰는 야간 노동자의 빼곡한 노트. 올해에도 260개의 인생이 나를 통과했다.


마지막 수업 시간, 나는 학우들에게 말해 주었다.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글 써도 괜찮아요. 우리에겐 저마다 살아온 고유한 인생이 있어요. ‘아름답고 훌륭하게’ 잘 쓰는 게 아니라 ‘유감없이 충분하게’ 잘 쓸 수 있어요. 기능 말고 마음으로, 타인의 평가 말고 나만의 중심을 지키며 우리 인생을 계속 잘 써봐요. 쓰는 사람에겐 절망이 없다는 걸 여러분에게 배웠습니다.”


대학 시절 나의 스승은 사상가 이탁오의 말을 가르쳐 줬다.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서로에게 스승이자 친구가 되는 사우(師友) 관계야말로 진정 좋은 관계임을. 그 참뜻을 이제야 깨닫는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 우정에도 나이가 없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해의 지평을 넓히며, 우리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다. 가르치며 배운다. 우리 마주친 이 길에서 친구 같은 스승이 되는 것이 종내 나의 소망. 가르치며 배우며 우정의 길을 함께 걷는다. 나에겐 스승 같은 친구들이 이다지도 많다. (23.06.23)



6월 23일 자 동아일보 [관계의 재발견] 칼럼. 저의 스승 같은 친구들 세사대 학우들에 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지난겨울부터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준비했던 수업 '글쓰기의 이해'가 종강합니다. 3년 전부터 제 수업을 들었던 저의 첫 학우들을 떠나보낸다는 의미이기도 한데요. 요 며칠 마음에 쓸쓸한 바람이 일어 어수선했어요. 만나본 적 없지만 깊이 교우해 본 우리는 무슨 사이일까. 우리는 가르치며 배우며 우정을 나누는 사우(師友)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여러분을 만나 저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었거든요.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오래오래 쓰면서 걸어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연결된 우정의 길을 함께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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