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했던 가을도 잠시, 입동을 지나자 매서운 한파가 몰려왔다. 11월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불현듯 가을에서 겨울로 저무는 계절, 하루가 이르게 어두워지고 빠르게 추워지는 바람에 마음도 갈피 없이 심란해진다. 벌써 한 해의 끝자락이라니. 올해 나는 어떤 삶을 살았던가, 잃어버린 것들과 잊어버린 것들이 떠올라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참 좋았던 날씨와 풍경과 순간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 같은 허망함에 몹시도 쓸쓸해진다.
11월 초 ‘관계의 재발견’ 연재 글을 모아 책을 출간했다. 2021년 팬데믹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되던 초봄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신문 귀퉁이에 조그맣게 실리는 지면을 어떤 글로 채울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를 발견해야 할까. 작가로서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모쪼록 힘이 나는 따스한 이야기로, 나날이 아프고 슬픈 소식들이 넘쳐나지만 한 줌의 햇볕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픈 바람으로 글을 썼다. 연재해 온 글들은 제법 두툼하게 쌓였고 한데 묶여서 책이 되었다.
갓 나온 책을 품에 안고 하원하는 아이들을 기다렸다.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 나무마다 나뭇잎을 떨구고 있었다. 매서운 날씨에 옷깃을 단단히 여며야 했다. 아이들을 만났을 때, 찬 바람에 얼어붙은 내 손을 맞잡은 아이가 말했다. “엄마 손이 얼음 같아. 녹여줘야겠다.” 입김을 불어주었다. 호오. 손등에 닿는 여린 온기를 느끼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억해야지. 이 사랑을 기억해야지. 이런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끝내 얼어붙지 않도록 기어코 내 삶을 데워준다.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불렀다지. 마음이 11월 같을 때, 비바람에 나뒹구는 나뭇잎처럼 세상에서 홀로 춥고 쓸쓸하다 느낀다면, 사람의 입김 같은 이야기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살아온 시간 가운데, 우리를 살게 한 좋은 기억들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저물어 가는 11월에 에밀리 디킨슨의 시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읊조린다. 우린 이미 사랑을 알고 있다. 내가 가진 사랑은 내가 경험한 세상의 모든 것, 애써 마음에 담아보려 노력한 만큼만 담을 수 있는 것. 어느새 이불처럼 거리를 폭닥 덮어버린 플라타너스 낙엽 위를 걸으며 나는 사랑을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는대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니야. 여전히 우리 안에는 선명한 사랑이 있다. (23. 11. 17)
11월 17일 자 동아일보 [관계의 재발견] 칼럼, 사랑을 담으려 노력하는 11월의 마음에 관해 썼습니다. "오늘 첫눈이 올지도 모른대." 일기예보 눈소식을 전하며 아이들을 깨웠는데요. 등원길에 하룻밤새 차가워진 공기에 하얀 입김이 나오더라고요. "입에서 하얀 바람이 불어." 말하는 아이들이랑 손잡고 걸어가는데, 동그랗고 투명한 막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미 사랑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오늘 첫눈이 내린다면, 사랑하는 이에게 메시지 보내는 멋진 하루 보내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