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관계의 재발견]
휴먼다큐 작가로 일할 때, 대선배 피디와 편집실에서 나눴던 대화. 꼬박 20일간 한 가족의 일상을 담아 온 방대한 영상을 훑어보면서 선배가 물었다. “고 작가라면 어떤 장면을 골라 붙이겠어?” 나는 고민하다가 가족들이 둘러앉아 저녁 식사하는 장면을 골랐다. “자연스러워서요. 대단한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평소 이 가족의 진짜 모습 같아요.” 가족들 간에 자연스러운 웃음과 대화가 오가던 지극히 평범한 순간이었다.
선배가 말했다. “보는 눈이 좋구나. 네가 보는 그대로 소소한 일상이 모여서 인생이 된단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이야말로 돌아보면 생에 좋은 장면으로 뭉클하게 빛난다. 이후로 나는 우리의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라 믿는 작가가 되었다.
요즘은 매일 1초씩 영상을 찍어 모으는 스마트폰 앱으로 일상을 기록한다. 되도록 가족들과 함께인 순간으로 매일매일 1초씩만. 찰나 같은 짧은 장면들을 골라 모은다. 그렇게 한 달 동안 기록한 영상은 마지막 날에 재생한다. 30일의 기록, 30초의 인생이 영화처럼 지나간다. 우리는 매일매일. 졸린 눈 비비고 일어나 같이 밥 먹고 장난치고 걷고 뛰고 마구 웃다가 금세 다투고 토라지고 달래주고 나란히 누워 얘길 나누다가 잠든다. 이상하게 뭉클하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진솔한 순간들을 지켜보면서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매일매일 좋은 날 맞구나 빙그레 웃었다.
매일매일 1초씩만, 하루를 이어 붙일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장면을 남겨두고 싶은지. 누구에게나 있다. 남들에게 좋아 보이려고 억지로 만들어 낸 순간 말고, 좋으면 좋은 대로 궂으면 궂은 대로 그저 그 자체로 소중한 순간들이. 소소해서 평범하다 느끼는 하루에도 분명히 1초는 있다. 너무 익숙해서 깨닫지 못하지만 돌아보면 인생은 그런 것들로 채워져 있다.
어느 인디언의 말을 선물하고 싶다. ‘생의 길이 가로막혔다고 느껴질 때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너 자신의 노래를 불러라.’ 남들보다 더 잘해내려는 성취와 행복해 보이고픈 인정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내 인생을 노래했으면 좋겠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봄볕을 쬐며 한낮을 걸어보고, 보고 싶은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걸 먹고, 낯선 사람들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고, 가족들과 나란히 이불을 덮는 매일매일.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노래를 허밍하듯이 익숙해진 일상이라도 편안하고 즐겁게 만끽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건 이미 당신에게 있다. 다가올 내일을 기대하며 주어진 오늘을 소중하게. 그런 사람에겐 아무렴 매일매일 좋은 날일 것이다. (24.03.22)
오늘 간직할 당신의 1초는 무엇인가요?
허밍하듯 익숙하고 편안하게 내 인생의 노래를 부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