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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Sep 17. 2015

목요일의 장례식

세 번의 장례식, 그리고 죽음의 발음

장례식장 옆에서 3년 정도 산 적이 있다.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창밖에선 곡소리가 났다. 출근길에는 어김없이 ‘謹弔’라는 한자가 붙어 있는 커다란 영구차를 만났다. 골목에서, 약국에서, 편의점에서. 나는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과 불쑥불쑥 마주쳤다. 지친 표정과 까칠한 피부, 퉁퉁 부은 눈 아래로 짙은 다크서클,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빛은 마치 저승사자 같았다. 늦은 퇴근길에 몇 번은, 정말로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를 뻔한 적도 있었다.


장례식장 일대, 그러니까 우리 집 주변은 언제나 서늘한 기운이 안개처럼 깔려있었다. 다른 곳보다 온도가 3, 4도쯤은 내려가 있는 것 같았다. 집에서 불과 몇십 미터 떨어진 곳에는 죽은 자와 슬픈 자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내 일상 속에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 끼어든다는 사실이, 나는 정말 싫었다. 꺼림칙했고 또 무서웠다.


상복을 입은 핏기 없는 얼굴들을 날마다 맞대야 하는 일상, 시간을 불문하고 상쾌한 아침에조차 곡소리를 들어야 하는 일상, 새벽이면 장례식장에서 튀어 나온 술주정 소리에 잠자리를 뒤척이는 밤들. 아직 ‘죽음’이 와 닿지 않았던 젊은 아가씨는, 그럴 때마다 불길한 까마귀라도 본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어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참석한 장례식은,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의 장례식이었다.


스무 살 여름이었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몰라 나는 도톰한 검은 재킷을 꺼내 입었다. 친구와 함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 한여름이었고 철 지난 두꺼운 옷을 입었는데도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선생님이 죽었다니.


스무 살 나에게 ‘죽음’이란 단어는 낯선 외국어처럼 어색했고 발음하기조차 꺼려졌다. 죽음. 발음하노라면, 썩은 포도알을 억지로 입안에 쑤셔 넣은 것처럼 불쾌했다. 역하고 비린 맛이 혀끝에 감돌았고, 물컹한 썩은 덩어리가 미끄덩미끄덩 입안을 굴러다녔다.


나는 빈소에 들어섰다. 그리고 영정사진 속 선생님의 얼굴과 마주쳤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어떻게 상주와 인사를 나누고, 헌화를 드리고, 절을 하고 나왔는지 아득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선생님의 얼굴만 아른거렸다. 빈소를 나오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테이블에 앉았다. 물 한 잔을 들이켜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제야 아는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갓 스무 살이 된 친구들은 옷차림에서부터 어린 태가 났다. 맨발에 샌들을 신고 온 친구, 짧은 치마를 입고 온 친구, 나처럼 철 지난 옷을 입고 와 땀을 뻘뻘 흘리는 친구도 있었다. 그중에 보라색 양말을 신고 온 친구가 있었는데, 맨발로 온 친구보다 더 심한 핀잔을 들었다. 아니, 어떻게 장례식에 보라색 양말을 신고 올 수가 있느냐고 엄청나게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이어서 동창들이 소곤대는 말들이 들렸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선생님에겐 장애를 가진 딸이 있었고, 최근에 집안 사정이 좋지 않으셨음을. 어느 날 새벽, 선생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언제나 썰렁한 농담을 던지며 친구들에게 웃음을 주었던 선생님에게는 그런 사정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장례식은 매우 조용했다. 웃음소리는 물론, 울음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냥 다들 쉬쉬 목소리를 낮추는 조용한 장례식이었다. 하지만 어린 동창들은 그 와중에 열심히도 소곤댔다. 베란다에서 뛰어 내리셨대. 머리가 다 깨졌다더라. 내 친구 동생이 그걸 봤다는데?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나는 연신 물만 들이켜며 언제 떠나야 하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때, 체육 선생님이 우리 자리로 오셨다. 그리고 우리 앞에 편육을 내밀더니 먹으라고 했다. 체육 선생님은 잘 지냈니, 참 예뻐졌구나, 숙녀가 다 되었네. 말하며 이를 드러내고 히히 웃었다. 선생님, 편육은 돼지머리를 잘라 눌러 만든 고기잖아요. 나는 한 입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웃으며 농을 거는 체육 선생님이 너무너무 싫어졌다.  



두 번째 장례식은,


대학교 선배 아버님의 장례식이었다.


스물세 살 여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선배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술 한잔 사주겠노라고. 나는 연신내로 향했다. 새내기 시절에 내가 좋아했던 선배였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다. 헤어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선배가 내게 말했다. 사실 아버님이 암 투병 중이시라고. 지금도 간호 중인데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고. 너무 놀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배는  괜찮아.라고 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선배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나는 마지막 전철을 탔지만, 환승역에서 전철이 끊기고 말았다. 집에 가는 버스까지 모두 끊겼다, 나는 대책 없이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까만 길을 걸었다.


그리고 2주 뒤, 나는 선배 아버님의 장례식장에 찾아갔다. 빈소에 들어서자 홀로 조문객을 맞이하는 선배가 서 있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선배의 모습이 낯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선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뒷머리가 싸늘했다. 손끝에서 슬픔이 뚝뚝 떨어졌다. 슬픔을 참는 어른스러운 선배의 얼굴이 낯설었다. 나보다 겨우 두 살이 많은 그는 혼자서 훌쩍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런 선배를 보고 있노라니, 2주 전에야 선배의 사정을 알게 된 나의 무심함이 부끄러웠고, 술 한 잔도 직접 사줄 수 없었던 어린 내가 미안했다. 막역한 사이의 누군가가 슬픈 일을 겪었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죽음’이라는 거대한 슬픔을 위로하는 방법을 그때는 몰랐다. 너무나 어리고 감성적인 마음에 주책없이 눈물만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세 번째 장례식은,


우리 외할머니의 장례식이었다.


스물일곱 살 봄이었다. 밤샘원고를 털고 한 시간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그사이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와 있었다. ‘수리야, 할머니가 돌아가셨단다. 준비하고 삼척으로 내려오렴.’ 뒤늦게 엄마의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늦어버린 한 시간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나는 할머니의 빈소를 찾았다. 상복을 입은 이모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오랜만이구나. 바쁠 텐데 내려오느라 수고했다. 먼저 할머니께 인사드리렴.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도 많았다. 나는 모두에게 어리둥절 인사를 건네고, 할머니 영정사진 앞에 섰다. 할머니, 많이 아프셨던 우리 할머니, 이제는 아프지 않으신가요. 나는 할머니께 헌화를 하고 절을 했다. 갑자기 울컥, 할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하지만 금방 괜찮아졌다. 슬펐지만 뭔가 이상한 기분이 함께 밀려왔다. 영정사진 속 할머니의 얼굴이 방긋하고, 꽃송이가 생생하고, 향냄새가 은은하고, 이모들의 울음소리가 아득하고, 빈소 안 공기가 따뜻했다. 할머니가 지금 여기, 가족들 곁에 와있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은 춥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녀로 검은 옷을 입고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정신없이 밀려드는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이모들의 잔심부름을 하고 한가한 시간에는 빈소 안에 앉아있었다. 할머니는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다섯을 두셨다. 그러다 보니 전국 각지에서 꽤 많은 가족이 모였다. 너무 많이 울었던 우리는 서 있을 힘도 없어서 벽에 조르르 기대고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살아 생전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리 엄마가, 우리 할머니가, 우리 장모님이, 우리 어머님이.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다가 또 울다가 그랬다. 한 사람이 울면 옆 사람도 따라 울었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은 또 나는구나. 우리는 마음껏 울었다. 빈소 가운데에 웃고 있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틀째 되는 날, 나는 할머니의 염습에 참여했다. 가족들 모두가 작은 방에 모여, 할머니의 몸을 깨끗이 닦아 드리고 수의를 입혀 드리는 의식을 지켜보았다. 아이고 아이고.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조심히 가소. 이모들이 큰 소리로 울었다.


할머니의 얼굴을 덮기 전, 우리는 마지막으로 할머니와 마주했다. 차례로 다가가 할머니의 얼굴을 마주 보고 할머니의 몸을 만졌다. 나는 작고 평온한 할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가만히 입을 다문 할머니는 살며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너무나 예뻤다.


할머니.


나는 할머니를 불러 보았다. 고요했다. 빛과 공기와 시간이 그대로 멈춘 것 같았다. 할머니, 안녕히 가세요.  마음 속에 벅차오르는 감정을 잔잔히 흘려보내며 나는 할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죽은 듯이 하루를 잤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화장을 하는데, 창밖에서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가 났다. 그때 아! 하고 나는 그대로 멈춰 버렸다. 누군가 세상을 떠났구나.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슬퍼하고 있구나. 해가 반짝이고 참새들이 지저귀는 맑은 아침에 아이고 아이고 슬픈 울음소리가 퍼져나갔다. 나는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죽은 자에게 소리 내어 울어 줄 슬픈 자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할머니가 떠올라 맘이 뭉클했다.


돌아온 나의 일상은 똑같았다. 나는 여전히 골목에서, 약국에서, 편의점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과 불쑥불쑥 마주쳤다. 아침이면 창밖에서 곡소리가 들려왔고, 출근길에 영구차를 만났다. 장례식장에서 튀어 나온 술주정 소리에 잠자리를 뒤척였다. 여전히 내 일상 속에는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 끼어들었고, 죽은 자와 슬픈 자들이 떠돌았다. 하지만 이제는 무섭지 않았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죽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장례식장에 가면 어떡해야 할지, 감정을 꾸미거나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냥 나는 내 감정이 가는 대로 슬퍼하고 위로하면 되는 거였다. 살아남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기 위해서, 혹은 슬픔에 빠진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해 울고, 모든 마음을 바쳐 슬퍼하고, 모든 기억을 더듬어 고인을 추모한다. 그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다시 살아가는 힘을 얻는 방법이기도 하다.


죽음과 슬픔과 삶은 모두 비슷한 울음소리를 가졌다. 소리 내어 울다가 또 소리 죽여 울다가, 힘이 빠지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울고 또 울고. 그 반복적인 울음소리는 마치 허밍 같기도 해서 혀끝에 머물고 입안을 굴러다닌다.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랬다. 나는 뒤늦게야 알았지만, 사실 죽음의 발음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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