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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Sep 21. 2015

월요일의 4의 세계

3학년 4반 4번, 4월 4일에 태어난 그 애의 세계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남자애는 3학년 때 내 짝꿍이었다.


짝꿍의 세계는 숫자 4로 돌아가고 있었다. 3학년 4반 4번, 생일도 4월 4일이었다. 애들은 숫자 4는 불길하고 재수없는 숫자라 4반 4번, 4월 4일에 태어난 내 짝꿍을  ‘재수없는 놈’이라고 놀렸다. 정말 유치했다.


우리 반은 좋아하는 사람 옆자리에 가서 앉는 방식으로 짝꿍을 정했다. 여자애가 앉아있으면 남자애가 가서 앉고, 남자애가 앉아있으면 여자애가 가서 앉았다. 우리는 일 년 내내 짝꿍이었다. 둘 다 서로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좋아했다.


좋아했다고 해도, 겨우 열 살이었던 그때의 감정이 얼마나 대단했을까. 그때는 ‘사귄다’라는 개념도 없었고, 좋아하는 이성에게 심각하게 목을 매는 일도 없었다. 얼굴을 보면 설레고 함께 있으면 기분 좋은, 그냥 ‘순수한 좋아요’의 감정이었다.



내 짝꿍은 못생긴 편이었다. 까만 얼굴에 역시나 새까만 참 머리가 바가지처럼 툭 얹어져 있었다. 뭉뚝한 주먹코에 쌍꺼풀도 없이 찢어진 눈은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있었다. 그리고 두툼한 입술까지. 짝꿍은 두꺼비같이 생겼었다. 넙데데한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볼이 불룩하게 부풀어 오를 것 같았다.


짝꿍은 패션 센스도 꽝이었다. 나는 짝꿍이 평상복을 입고 온 걸 본 적이 없었다. 짝꿍은 매일 촌스러운 청록색 학교 체육복을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책가방도 신주머니도 그냥 통 까만색이었다. 외모부터 차림새까지 죄다 우중충하다 보니, 짝꿍이 신은 하얀 실내화만 유난히 더 하얗게 튀었다. 짝꿍은 저어기 촌구석 시골 분교에서 갓 전학 온 촌뜨기 같았다. 짝꿍이 가진 물건 중에서 빛나고 매끈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짝꿍이 좋았다.


내가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짝꿍이 보통 남자애들이랑은 다르게 어른스러워서 좋아했던 것 같다. 짝꿍은 매일 같은 체육복만 입고 다녔지만, 체육복은 언제나 깨끗했고 빨랫비누 냄새가 났다. 애들이 숫자 4 같은 놈!  재수없는 놈! 놀려도 그냥 빙그레 웃고 말았다. 짝꿍은 조용조용히 말했고 큰 소리를 낸 적도, 친구들과 싸운 적도 없었다. 공부를 썩 잘하진 못했지만, 선생님 말씀을 열심히 들었고, 숙제도 청소도 성실히 했다. 화장실 청소나 우유 당번 같은 것들, 남들이 안 하는 궂은일도 나서서 말없이 했다. 짝꿍은 학급 어린이 회의에서 선행 어린이로 자주 뽑혔다. 언제나 깨끗했던 체육복과 하얀 실내화처럼 짝꿍은 반듯하고 성실한 아이였다.


우리는 함께 앉던 내내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내가 성깔을 부려도 짝꿍은 화를 내지 않았다. 우리는 그 흔한 책상 금 가르기도 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책상에 주욱 금을 긋고 넘어오지 말라고 했어도, 짝꿍은 “괜찮아, 그만큼은 너 줄게.”라고 말할 애였다. 그 애가 그냥 빙그레 웃는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짝꿍은 그런 애였다.  



반 애들이 짝꿍을  재수없는 놈이라고 부른 이유는, 잘난 체하는 성격이 아니꼬와서가 아니었다. 사실 짝꿍은 정말로  재수없는 놈이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불운한 놈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짝꿍에겐 재수라고 할만한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 짝꿍의 집은 가난했고, 가정환경도 좋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에게는 지적장애가 있었다.


짝꿍의 엄마는 늘 놀이터에 앉아 있었다. 커다란 몸집에 짧은 파마머리를 한 아줌마였다. 얼핏 보면 그냥 동네 아줌마 같았지만, 가만히 보면 많이 이상했다. 색깔이며 사이즈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껴입고, 맨발에 허름한 슬리퍼를 신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어허허 큰 소리로 웃곤 했다. 짝꿍의 엄마는 그렇게 이상한 차림새와 얼굴로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터 한복판, 시소나 그네 같은 곳에 앉아있었다.


나는 학교를 오갈 때마다 슬쩍슬쩍 아줌마를 보곤 했다. 처음엔 이상한 사람 같아서 무서웠다. 그러다가 친구들 얘기를 듣고 그 아줌마가 짝꿍의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은 충격적인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그날도 아줌마는 그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네 밑으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줌마가 오줌을 싼 것이었다. 아줌마는 그것도 모르고 어허허 웃고만 있었다. 놀이터에서 놀던 애들이 수군거렸다. 그때였다. 내 짝꿍이 걸어오더니 아줌마를 부축하고는 천천히 걸어나갔다. 이상하게도 짝꿍을 놀리는 애들은 한 명도 없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고, 놀이터는 조용했다.


나는 그 이후로 짝꿍을 생각할 때마다 그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 애는 얼굴도 빨개지지 않았을 거고, 그냥 입을 다문 채 빙그레 웃었을 것이다. 그 애는 정말이지 어른스러웠다. 나는 그런 짝꿍이 가여운 마음도 들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냥 어쨌든 정말로 짝꿍이 좋았다.  


하지만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 다시 짝꿍을 떠올려보니, 그 애는 어른스러운 게 아니었다. 어른들도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재수없는 놈이라는 놀림에도 조용히 웃고, 단벌 체육복으로 학교를 오가고, 가난한 소지품을 깨끗이 빨아 말려 입고, 오줌을 지린 엄마를 가만히 데리고 가는 그런 행동은 어른들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애는 조그만 아이였지만,  재수없는 4의 세계를 그냥 꿋꿋이 견디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열아홉 살이 되었다. 나는 짝꿍의 미니홈피를 찾아가 봤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열아홉 살이 된 짝꿍의 사진이 있었다. 그 애는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표정은 달라져 있었다. 까만 얼굴에 역시나 새까만 참 머리가 바짝 깎여 있었다. 뭉뚝한 주먹코에 쌍꺼풀도 없이 찢어진 눈은 위를 치켜뜨고 있었고, 넙데데한 얼굴은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조금 놀랐고, ‘반갑다. 내 짝꿍!’ 따위의 글을 남길 수가 없었다. 나는 조용히 컴퓨터를 꺼버렸다.   


4의 세계.

불길하고 재수없는 내 짝꿍의 세계는 어땠을까. 그 애는 언제까지 그 세계를 말없이 견뎌냈던 것일까.


지금도 나는 종종 내 짝꿍을 떠올린다. 두꺼비 같은 얼굴로 빙그레 웃던 그 애, 빨랫비누 냄새가 나던 청록색 체육복과 하얀 실내화를 신은 그 애. 말없이 내 책상 위에 우유를 올려놓던 그 애.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던 그 애.


내 기억 속에 넌 절대로  재수없는 놈이 아니었는데. 만지면 뽀드득 소리가 날 것 같은 하얀 눈송이처럼, 착하고 반갑기만 한 내 짝꿍이었는데. 그 애가 다시 한 번 내 옆자리에 앉았으면 좋겠다.


아, 나는 한 번이라도 그 애에게 괜찮냐고 물어봐 줄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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