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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21. 2015

누구나 누군가의 별

어둠 속에 보이지는 않아도 누군가에게만 반짝이는 별이 있다

열여섯 여름, 성적표를 받아온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출해봤다. 그런 날에 가출이라면 으레 시험을 망쳤겠거니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날 생애 최고의 성적을 받아왔다.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와 자랑스럽게 성적표를 내밀었다. “엄마, 나 전교 20등 했어!”


정말 잘했어. 대단해! 엄마는 듬뿍듬뿍 칭찬해주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서도 성적표를 쳐다보며 헤실거렸다. 그런데 그때 툭, 남동생이 말했다. “뭐야. 겨우 그거 가지고 난리야. 전교 10등 안에도 못 드는 주제에.” 벙찐 얼굴로 남동생을 쳐다봤다. 피식. 내게 비웃음을 날리던 그 녀석은 얄밉게도 전교 1등이었다.


“전교 20등도 잘한 거야.”

“그래 봤자 반에서 3, 4등이잖아.”

“그래도 나 진짜 열심히 공부했어.”

“난 열심히 안 해도 1등인데? 반 1등. 전교 1등.”


정말이지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으나, 중1 동생에게 성적 하나로 놀림이나 당해야 했던 사춘기 중3 누나는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때 녀석이 결정적인 한마디를 날렸다. “돌. 머. 리.” 결국, 내 단단한 돌머리는 빠지직 금이 가고야 말았다.


그 시절 동생은 전교 1, 2등을 다투는 수재였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고만고만한 상위권에 머무르는 열공생이었다. 같은 방을 쓰던 우리는 공부 스타일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나는 코피 쏟도록 책상에 붙어 밤샘 공부를 하는 열공생이었고, 동생은 책상에 발 올리고 팔랑팔랑 교과서를 넘기던 날라리 수재. 해만 떨어지면 쿨쿨 먼저 잠이 들었다.

 

나는 성실파, 동생은 요령파 혹은 천재파.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만년 3등을 벗어날 수 없었던 나는, 동생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아마도 우리의 우등과 열등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졌는지도. 이게 다 아이큐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아이큐 테스트를 했을 때, 나는 130. 동생은 150이었다. 우리의 아이큐는 20이나 차이가 났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그건 결정적인 순간마다 우리를 갈라놨다. 타고난 지능지수 격차 20. 도무지 쫓아갈 수 없는 나와 동생의 성적 차이 20등. 내가 동생을 질투한 거리 20cm. 우리는 딱 20만큼 벌어져 있었다. 


어느 집안이든 형제끼리는 비교를 당하기 마련일 텐데,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우린 조금 달랐다.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우리 딸은 성실해서 참 좋아. 어쩜 그렇게 열심히니. 너만큼 성실한 애도 없을 거다. 결과가 안 좋아도 낙담하지 마. 태도가 중요한 거야. 성실의 힘은 대단하단다.”


엄마는 동생에게 말했다. “그렇게 대충 공부하는 데도 어떻게 성적이 잘 나올까. 근데 너 요령 피우면 안 돼. 요령은 한순간이야. 뭐든 진득하게 하는 과정이 중요한 거야. 녀석아, 누나 좀 본받아.”


지금 생각해보면 동생 입장에서 엄마의 비교는 억울하다. 남들이 칭찬하고 부러워 마지않는 전교 1등.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생에겐 몹시도 억울한 비교였을 거다. 오히려 자기보다 공부 못하는 누나를 칭찬하는 엄마가 야속하고, 머리는 안 쓰고 그저 책상에만 앉아 있는 누나가 답답했을 거다. 걔도 내가 얼마나 얄미웠을까.

 

하지만 그때 우리는 철딱서니 중1, 유리멘탈 중3이었다. 게다가 용띠와 범띠, 극 O형과 극 B형. 그야말로 최악의 콤비였다. 돌. 머. 리. 그 한마디에 나의 유리멘탈은 와장창 부서졌고 나는 펑펑 울었다. 급기야 한밤중에 집을 뛰쳐나가 버렸다. 내가 찾아간 곳은 겨우 아파트 단지 아래에 우거진 수풀이었다. 소심하고 고분고분하며 잔머리에 능하지 못했기에 남들만치 호방한 가출은 꿈도 꾸지 못했던 나. 깜깜한 수풀 안에 쪼그리고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 있었다. 초여름 밤이었다. 바람은 선선하고, 풀냄새가 싱그럽고, 별이 반짝이고, 나는 또르르 울었다. ‘나쁜 새끼. 공부만 잘하면 다야?’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숫자 20을 떠올렸다. 내 생애 최고의 등수 20. 하지만 우리의 성적 차이 20. 우리의 아이큐 차이 20. 그래서 내가 동생을 질투하는 거리 20. 나는 아무리 해도 못 따라가겠는데 어떡하란 말이야. 서러운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나왔다.

 

그때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리야, 수리야. 고수리.” 가족들이 나와서 나를 찾고 있었다. 조금 덜 서러워졌다. 맘 같아선 냉큼 달려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출을 감행한 입장에서 이렇게나 빨리 집에 들어가는 건, 어쩐지 진지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일 같았다. 나는 더 깊숙이 몸을 숨겼다. 괜히 가슴이 도곤도곤하고 온몸이 따끔따끔했다.


잠시 후, 나를 찾는 소리는 사라졌다. 눈물도 뚝 그쳐버렸다. 그러자 걱정이 몰려왔다. 나 이제 집에 어떻게 들어가지? 얼마 동안이나 밖에 머물러야 가출다운 가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싱거워 보이긴 싫었다. 나는 몹시 상처받았고 나름 진지하게 반항했다는 걸 가족들에게 보여줘야 했다.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가려운 거야. 슬픔은 안녕. 코앞의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친 나는 팔뚝과 종아리를 벅벅 긁었다. 아! 온몸이 따끔따끔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여름 수풀이 모기들의 은신처였다는 걸 왜 몰랐을까. 돌머리. 진짜 돌머리 맞네. 뺨과 눈두덩까지 모기에 물리고 나서야 나는 수풀에서 나왔다. 이제 집에 들어가야 했다. 그래, 이게 다 모기 때문이었다.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불이 꺼진 안방에선 텔레비전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우리 방에 들어갔다. 동생은 어울리지 않게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책상에 앉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기말고사까지 모두 끝난 마당에 공부할 것도 없으면서 팔랑팔랑 책만 넘겼 다. 그때 동생이 나를 불렀다.

 

“누나.” 

“왜?” 

“아이스크림 먹을래?” 


나는 부루퉁한 채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동생을 쳐다봤다.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동생도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빵빵하게 부어 있었다. 푸하하. 우린 동시에 웃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 눈물도 터져 나왔다. 웃으면서 울다가. 아니, 울면서 웃다가. 아무튼, 우리는 이상한 얼굴로 같이 빵빠레를 먹었다.

 

그날 이후로 동생은 한 번도 나에게 성적 얘기를 하지 않았다. 녀석은 변함없이 전교 등수에서 놀았고, 나는 더더, 더 성적이 떨어졌다. 결국, 우리의 성적 차는 훨씬 더 벌어졌지만 우리 사이는 훨씬 더 가까워졌다. 우리의 아이큐 차는 여전히 20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결코 이 모든 게 아이큐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동생은 좋은 회사에 들어갔다가 뒤늦게야 자신의 진짜 길을 찾겠다며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다시 공부하며 도전하고 있는 동생은 엄마가 말했던 성실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말한다. 


“누나, 난 칼퇴 못 해도 좋고 돈도 적게 벌어도 좋아. 나만 할 수 있는 일, 성취감 있는 일을 하 고 싶어. 나다운 삶을 살고 싶다.”


빛나는 길을 박차고 나와, 기꺼이 빛나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동생을 응원한다. 그래도 녀석이 꽤 힘들겠구나, 안타까운 게 솔직한 누나 마음. 그럴 때마다 나는 가출했던 그날의 밤하늘을 동생에게 보여주고 싶다.


까만 하늘에는 별이 총총 빛났다. 하지만 그렇게 총총 빛나는 별은 열 손가락으로 전부 다 셀 수 있을 만큼이나 적었다.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별이 있다는데 보이는 건 이것뿐이라니.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나는 숫자 20을 떠올렸다. 


‘세상에, 별이 20개도 안 돼. 나 같은 건 보이지도 않을 거야.’ 


빛나는 몇 개의 별을 바라보며 퐁퐁 울었다. 나는 까만 하늘 속에 숨어버린 무수한 별 중에 하나. 빛나지 않았다. 나는 별이 아닌 걸까. 


그날 밤을 기억한다. 숨어버린 별도, 선선한 바람도, 싱그러운 풀냄새도, 부지런한 모기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있었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수리야, 집에 가자.”

그날 밤, 가족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숨어버린 나를 찾았다. 보이지도 않는 나를. 그때 깨달았다. 나는 우리 가족에게만큼은 반짝이는 별이라는 걸.


어둠 속에 보이지는 않아도 누군가에게만 반짝이는 별이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별이었다. 


누구나, 누군가의 별이었다.



고수리 에세이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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