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숙사생의 수능 도시락
여고 시절 기숙사 생활을 했다. 기숙사는 학교 건물 안에 있었는데, 밤이면 학교의 모든 문을 걸어 잠갔고 우리는 갇힌 채로 자습실에서 공부를 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공부만 할 리는 없었다. 한창 배고플 나이다 보니 야식을 엄청나게 먹었다. 컵라면과 과자는 기본, 줄넘기 여러 개를 엮어 창밖으로 던져서 배달온 치킨을 매달아 끌어올리기도 했다. 배달원 오빠와 친해진 경우에는 종종 소주도 함께 담겨 있었다. 그럼 사감 몰래 옥상에 올라가 그것들을 까먹곤 했다. 내 친구가 그 오빠와 썸을 탔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지만. 아무튼 우린, 우리들 나름의 로망을 즐겼다.
그러나 고3이 되고 달라졌다. 고3 교실은 피곤과 냉기가 흐르는 살얼음판이었다. 수능 D-100에 들어서면서부터 친구들은 부쩍 예민해졌다. 툭 하면 짜증 내고 툭 하면 울었다. 별것 아닌 일에도 정말로 툭 건들기만 하면 눈물이 주룩주룩. 오르락내리락 하는 성적표를 받아들고서 하루에도 수십 번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던 고3 생활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시간은 놀랍게도 빠르게 흘러 수능 D-1이 되었다. 대부분 기숙사생들은 예비소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기숙사생 중에서도 궁극의 기숙사생, 전라도에서 반나절은 달려야 갈 수 있는 강원도에서 온 유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이모네 집이 있었지만 수능 전날 낯선 곳에서 자는 건 오히려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마다했다.
나와 비슷한 사정으로 남은 친구들이 세 명. 수능 전날 밤의 기숙사는 고요했다. 사이가 서먹한 다른 반 친구들과 자습실에서 공부를 했다. 조용히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평소처럼 목에 수건을 두른 기숙사생 친구들이 추리닝 바람으로 “수리야아!” 소리치면서 시끄럽게 달려온다면 차라리 나을 텐데.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서글퍼졌다. 수능 전날, 다른 애들은 따뜻한 집에서 엄마가 깎아준 과일을 먹고 있으려나. 나만 차가운 콘크리트 자습실에 혼자 툭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보고 싶었다. 친구들도 엄마도. 그러나 엄마와는 짧은 통화가 전부였다. “엄마, 나 괜찮아. 자신 있어. 잘 보고 올게!” 씩씩하게 말했다.
이 싱숭생숭한 기분은 뭘까. 수능에 대한 부담감과 함께, 이 시험을 보려고 내가 12년을 그렇게 죽어라 공부한 건가 싶은 허무함이 밀려왔다. 별별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그 날은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수능 D-day.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 급식소에서 도시락을 받았다. 기숙사에 남은 기숙사생이 너무 적어서였는지 편의점에서 사 온 것 같은 도시락이었다. 일회용 플라스틱 통은 넓적하고 커서 손에 들기가 좀 부끄러웠다. 떡 상자 같은 도시락을 들고 수험장으로 향했다.
나는 실전 타입은 아닌가 보다. 1교시 언어영역을 치르는 동안 바들바들 떨었다. 시험을 치를 당시에는 머릿속이 새하얘져 몰랐는데, 옆에서 시험 봤던 친구가 나중에 얘기해줬다. 너 진짜 엄청 떨었다고.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고. 그렇게 벌벌 떨면서 수리영역까지 무슨 정신으로 봤는지 모르겠다.
점심시간. 친구들과 모여서 점심을 먹었다. 친구들은 하나 둘 도시락을 꺼냈다. 작고 동그란 색색의 도시락들. 그동안 급식만 먹느라고 몰랐는데 도시락은 그렇게 생긴 거였다. 동그랗게.
색색의 도시락에는 달걀말이, 분홍 소시지, 멸치볶음, 장조림, 김치 같은 반찬들이 옹기종기 담겨 있었다. 보온도시락을 싸 온 친구도 있었다. 제일 아래 칸에는 된장국이 아직도 따뜻했다.
나는 친구들의 수능 도시락이 부러웠다. 아주 많이 부러웠다. 아침에 엄마들이 손수 싸주신 것들이었다. 우리 딸 시험 잘 보게 해주세요, 마음을 담아서. 체하지 않도록 가장 평범하고 익숙한 집 반찬들을 그대로 담아준 소박한 도시락이었다. 반찬 종류는 비슷했지만, 온기 없는 널빤지 같은 내 도시락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밥맛이 사라졌다. 차라리 분식집에서 김밥을 사 올걸. 몇 젓가락 끼적대다가는 뚜껑을 덮었다.
외국어와 사회탐구 영역까지 치르고, 제2외국어는 찍고. 등짝이 뻐근할 때쯤 시험은 끝났다. 드디어 수능이 끝났다. 하나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정말이지 홀가분한 만큼 허무했다. 친구들은 가방을 챙겨 들고 수험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다가 수험장을 나서기 전에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사람들이 커다란 구름처럼 교문 앞에 뭉게뭉게 피어 있었다. 엄마! 부르며 뛰어가는 친구들, 학교 앞에서 내내 기다렸던 부모님들이 친구들을 안아주었고, 여기저기서 눈물이 터졌다. 하지만 나는 교문을 통과할 자신이 없었다.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며 걸어가는 와중에도 ‘나 이제 어디로 가지? 이모네 집으로 가야 하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수리야.” 교문 앞에 엄마가 서 있었다.
너무 놀라서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으엉으엉 울음이 터져버렸다. 그대로 달려가 와락 안겼다. 엄마, 못 와도 괜찮아. 걱정하지 마. 태연한 척 의연한 척했어도 나도 결국 엄마 품이 그리운 애였다. “수고했어. 장하다, 우리 딸.” 엄마가 등을 쓸어주었다. 엄마 냄새가 났다. 엄마의 젖가슴이 뭉클, 내 마음도 뭉클. 그렇게 안겨서 부끄럽게도 많이 울었다. 엄마도 울고, 덩달아 곁에 있던 이모도 울고.
수능 당일, 올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던 엄마는, 수능을 하루 앞둔 나에게 어떤 얘기도 할 수 없었다. 내 컨디션에 영향을 줄까봐 그랬다고. 하지만 기어이 하던 일들 제쳐두고 강원도에서 전라도까지 먼 길을 달려와 주었다.
엄마는 “이노무 기지배, 왜 이렇게 살이 쪘어?” 내 등짝을 맵게 때리면서 울었다. 역시 우리 엄마야. 내가 피둥피둥 살이 찐 게 그렇게나 슬펐다고. 이모가 말리지 않았다면 내 등짝은 남아나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그날, 엄마는 살찐 딸을 데리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러 갔다. 아마도 우리 엄마의 사랑은 도시락이 아니라 삼겹살이었나 보다.
12년이란 시간을 쏟아부었고 세상의 전부 같았던, 수능 시험 결과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망했다’라는 기억 정도. 그러나 그날의 수능 도시락은 두고두고 기억난다. 나는 이게 인생같다. 훗날 수능을 망치고도 잘만 사는 사람들이 나를 포함하여 아주 많다는 거. 그러니까 우리 외로워도 실패해도 조금만 울고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고수리 에세이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에 수록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