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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Dec 24. 2021

10살 산타클로스 분투기

사랑이 존재하는 한, 산타클로스는 있다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이었다. 마음이 초조했다. 텔레비전을 보고 알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리지 않을 거란 걸. 부모님의 대화를 엿듣고 짐작했다. 우리 집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그리고 엄마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선 눈치챘다. 오늘 밤에도 아버지는 술에 취해 들어올 거란 걸.


크리스마스가 싫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12월이 훌쩍 지나가 있기를 바랐다. 내년이면 나는 열한 살이었고 앞자리 숫자 10을 넘겼으니 제법 큰 어린이였다. 하지만 내 동생은… 나는 입을 헤 벌린 채 태평하게 만화영화를 보고 있는 동생을 쳐다보며 초조해졌다. 녀석은 아직도 산타클로스를 믿었다.


작년 크리스마스 아침, 동생의 머리맡에는 미니카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우와아아! 미니카!” 방바닥을 굴러다니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한 녀석은, 대뜸 내년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예약해두었다. 당연히 미니카였다. 하지만 올해 크리스마스는 동생의 여덟 살 인생 최악의 날이 될 것이다. 크리스마스 아침, 녀석의 머리맡에는 미니카는커녕, 미니카보다 못한 선물조차 없을 것이다. 올해 크리스마스부터는 산타클로스가 없으리란 걸 나는 알아버렸다. 산타클로스는 없다. 우리 집에는 이제 산타클로스가 없다.


산타클로스는 남들보다 조금 더 가난하고 조금 더 불우한 집에는 일찍이 발길을 끊었다. 그 집 애들은 울고불고 떼쟁이도 아니고, 티 없이 착하고 예쁘기만 하더라만. 그래도 산타클로스는 더 잘 살고 더 행복한 집들만 찾아가 따뜻한 방 안에 오래오래 머무는 것이었다. 슬픈 일이었다.


나는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그러고도 모른 척 꾸욱 입을 다물고 주변 눈치 살피기가 몸에 밴 여자애. 나는 그런 애였다. 아버지 눈치를 살피며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를 했고, 엄마 눈치를 보며 다가가 숟가락을 놓거나 설거지를 도왔다. 갖고 싶은 인형이 있어도 문구사에서 물끄러미 쳐다만 보다 돌아왔고, 신발 한 켤레를 사더라도 금세 커버린 발가락이 아파서 물집이 잡힐 때까지도 암말 않고 신고 다녔다.


너무 일찍 어른들의 세계를 알아버린다는 것. 더럽고 무섭고 힘들고 슬픈 것들을 보고도 모른 척한다는 것.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걸 알아버린 불행보다 어른들의 세계는 훨씬 더 불행했다.


아이고 야야, 내가 이제 살아봤자 얼마나 더 살겠노. 헛헛한 푸념을 늘어놓는 할머니가 어린애 옷을 뒤집어쓰고도 열 살 인척, 다 모르는 척 눈치 보며 살아가는 것처럼. 나는 너무 일찍 철이 든 늙은 애였다. 조숙하고 영악했다. 어딘가 잔망스런 구석도 있었다. 한편으론 내가 말썽부리지 않고 뭐든 잘하기만 하면, 우리 가족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믿으며 순진했다. 나는 내 동생을 지켜주고 싶었다. 여덟 살이면 그런 것들 아직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다. 말썽꾸러기로 개구쟁이로 동생이 조금 더 오래 남아 주길 바랐다.


고민하던 나는 저금통을 품에 안고 집 앞 문구사로 달려갔다. 그린문구센터로. 아직도 생생하다. 집에서 나와 직진으로 뻗은 길을 곧장 내달리면, 오래된 철길 건널목 하나가 나타났다. 건널목을 지나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그곳에 그린문구센터가 외딴 섬처럼 황황히 빛나고 있었다.


센터라는 이름이 머쓱할 정도로 겨우 다섯 평 남짓한 작은 문구사였지만, 내게는 황홀한 꿈의 장소였다. 학교 앞 오래된 문방구와는 달랐다. 온실처럼 사방이 투명한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세련된 문구사. 유리벽 너머로는 예쁘고 근사한 온갖 종류의 학용품과 장난감들이 오밀조밀 전시되어 있었다. 마치 유리로 만들어진 네모난 종합선물상자 같달까.


하루에 꼭 한 번씩은 그린문구센터를 찾아갔다. 아기자기한 문구들과 바비 인형을 오래도록 구경했지만, 끝내는 겨우 백 원짜리 지우개나 하나씩 사가는 게 전부였다. 백 원짜리 단골이래도 매일 찾아오는 내가 귀여웠는지 주인아줌마는 종종 달콤한 거 하나씩을 손에 쥐여주곤 했다.


그린문구센터에 들어간 나는, 제일 저렴해 보이는 미니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아줌마에게 미니카와 저금통을 내밀었다. “이게 뭐니?” “저금통에 있는 돈으로 이거 사려고요.” 아줌마는 저금통 철 뚜껑을 뜯어내고 카운터 바닥에 돈을 쏟았다. 촤르르, 샛노란 동전들이 쏟아졌다. “십 원짜리가 많네.”


동전을 세기 시작했다. 나도 아줌마의 손을 따라 함께 동전을 셌다. 양만 많았지, 눈짐작으로 세어보니 아무래도 불안했다. 동전을 모두 센 아줌마가 말했다. “얘, 이걸로는 턱도 없구나.” “제일 싼 미니카도 못 사요?” “응, 이걸론 안 돼. 미니카가 얼마나 비싼데. 엄마한테 돈을 더 달라고 하렴.”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근데 꼭 미니카를 사야 돼?”

“선물 주려고요.”

“누구한테?”

“제 동생이요.”

“아, 그 꼬맹이.”


아줌마는 그 개구쟁이 녀석 잘 알지, 하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잘 봐. 동전이 전부 다 합쳐서 삼천 원이 안 돼. 그렇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니까. 몇백 원쯤 아줌마가 보태줄게. 미니카 말고 삼천 원짜리 선물을 골라 보려무나.”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심하며 선물을 고르는데, 은색 철 필통이 눈에 띄었다. 매끄러운 은색 철 필통 표면에 작은 기차가 조르르 그려져 있었다. 사실은 전부터 내가 가지고 싶었던 필통이었다. 그 필통과 연필 한 자루, 캐릭터 지우개를 골랐다. 딱 삼천 원어치 선물이었다. “동생 생일이 크리스마스인가 봐?” “네….” 아니요. 내 동생 생일은 9월이었다. 얼떨결에 거짓말을 하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필통 안에 연필과 지우개를 넣었다. 아줌마는 빨간 별 포장지로 필통을 포장하고 금색 리본까지 달아주셨다. 너무 예뻐서, 이걸 동생에게 몰래 전해줄 생각에 헤실헤실 웃음이 났다. 누가 볼세라 얼른 코트 안에 필통을 숨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걸을 때마다 품 안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다.

크리스마스이브 밤. 동생은 일찍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왔고, 소란스러운 밤이 흘렀다. 그래도 동생은 쿨쿨 잘만 잤다. 나는 잠들지 못했다. 소란이 잦아들고 새벽이 되었을 때, 몰래 일어나 가방에서 선물을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레 동생의 머리맡에 올려놓았다. 편지를 쓰면 내 글씨가 탄로 날까 봐 덩그러니 선물만 두었다.


훌러덩 배를 까고 자고 있는 동생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나도 목까지 이불을 끌어 덮고선 크리스마스트리의 별처럼 반짝이는 선물을 바라보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네고 잠이 들었다. 짤막하게 이어진 꿈속에선 내 동생이 웃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동생은 머리맡 선물을 발견했다. 우와아아! 소리를 지르며 포장지를 뜯는 동생. 지켜보는 내 심장도 터질 것 같았다. “어? 이게 뭐야.” 은색 필통을 발견한 동생의 얼굴이 구겨졌다.


“좋겠다. 산타클로스가 선물 줬나 보네.”

“미니카가 아니잖아!”


녀석은 씩씩거리더니 선물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곤 울음을 터트렸다. 필통을 주워 보니, 모서리가 우그러져 있었다. 나도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시끄러운 소리에 달려온 엄마에게 동생은 울면서 말했다. “엄마, 산타클로스가 이상한 거 줬어.”


엄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포장지가 반쯤 뜯긴 필통을 바라보았다. 우는 동생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거의 울 듯한 얼굴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시치미를 뚝 잡아뗐다. 끝까지 모른 체했다. 나는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자꾸만 눈물이 퐁퐁 솟아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엄마가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잊지 못할 눈물의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다. 이 글을 쓰다가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산타클로스 없다는 거 언제 알았어?”

“초등학교 삼사 학년 때?”

“받았던 선물 중에 뭐가 제일 기억나?”

“미니카! 태백에 살 때였나? 첫 미니카였어.”

“혹시 필통은? 생각 안 나?”

“필통? 그런 게 있었나? 아아. 생각난다. 철 필통이었지? 그거 진짜 싫었어.”


그래, 네가 그렇게 싫어했던 그 선물, 사실 내가 줬던 거란다. 찬바람을 헤치고 달려가 저금통도 다 깨고, 잠도 뒤척이다가 네 머리맡에 몰래 놓아두었단다. 그해에는 내가 산타클로스였어. “그건 왜?” “아니야.” 나는 전부 말해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산타클로스는 있다. 살다 보면 지켜주고 싶은 거짓말 하나쯤은 있다.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은 착한 거짓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시치미를 뚝 잡아떼고 간절히 지켜주고 싶은 그 마음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사랑받는 아이였다. 우리를 사랑한 누군가가 온 힘을 다해 우리를 지켜주었고, 그래서 우리는 더럽고 무섭고 힘들고 슬픈 것들을 모르고 자랐다.


시간이 흘러 더럽고 무섭고 힘들고 슬픈 어른들의 세계를 알게 된 후에는, 이제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지켜주려 한다. 온 힘을 다해 지키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산타클로스가 된다.


산타클로스는 있다. 이 세상에 사랑이 존재하는 한, 우리에게 산타클로스는 있다.





고수리 에세이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에 수록된 글입니다.

제가 무려 7년 전에 썼던 글이어서 다시 읽으니 부끄러운데요. 열 살 산타클로스를 상상하면, 그 무모함과 씩씩함을 안아주고 싶어요. 제가 간직한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여러분에게도 전해주고 싶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산타가 되어주는 크리스마스이길요.

메리 크리스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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